2024-04-19 02:19 (금)
가야불교에 대한 오류 바로잡기 ①
가야불교에 대한 오류 바로잡기 ①
  • 도명
  • 승인 2020.12.02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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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세상에는 많은 편견과 선입관이 존재한다. 그 편견과 선입관은 인간의 삶 전체에 보편적으로 퍼져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또 편견이나 선입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대개는 사실 전체에 대해 무지 하거나, 또는 잘못된 과거의 해석을 고집하거나, 아니면 어떤 목적과 이익을 위하여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사실을 알면서도 부정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은 학자라면 학자적 양심을 속이는 것이요, 국가라면 스스로 국격을 떨어뜨리는 문명 후진국이라 할 것이다. 만일 개인이나 단체, 국가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부분이 아닌 전면이 부정되고 그 결과 심각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가 일어난다면 역사왜곡은 범죄까지도 될 수 있다고 보여 지며,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치이고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역사왜곡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느냐 하면 왜곡된 사안을 접하게 되는 개인과 단체는 심한 열등의식의 정신적 피해와 함께 사실규명을 위한 시간과 열정, 연구 등의 물질적 비용도 함께 소모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발전할 수 있는 현재와 미래가 발목 잡혀 후퇴하기 때문이다.

 △잊혀진 가야로 가야불교 희생

 가야와 가야불교가 그 동안 이러한 선입관과 왜곡의 선상에 있었고, 현재에도 그러한 불합리는 상존하고 있다.

 역사 속에 520년간 엄연히 존재했던 가야는 한반도 침략을 위한 일본군 참모본부가 만든 정치논리인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희생물이 되어야 했고, 가야와 한배를 탄 가야불교도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지 못하듯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마는 법이고, 이제 바야흐로 그때가 된 것이다.

 가야불교의 첫 번째 오류는 아래에서 언급할 상교(像敎)에 대한 문제이다.

 혹자는 상교(像敎)를 불교 전체로 동일시(同一視) 하고 있으며, 가야불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단골 메뉴처럼 인용하는 부분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편 금관성파사석탑조 기사에 나오는 “然于時海東末 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土人不信伏 故本紀 無創寺之文”을 풀이하면 “그러할 때 해동의 끝에서는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들었으나 대개는 상교가 들어오지 않아 이 지방 사람들은 믿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본기에도 (이 지방 사람들이) 절을 세웠다는 글귀가 없다”라고 원문은 씌어져 있다,수로왕이 나라를 세워 허 왕후와 함께 통치할 때 해동의 끝자락인 가락국 김해에서는 불교가 들어와 도래인들이 절을 세우고 숭상했으나 기원전후는 아직 붓다가 입멸한지 1000년이 안된 正法시대라서 붓다 입멸 1000년 이후, 불상과 교법 위주의 불교인 像法시대의 불교 즉 상교가 도래하지 않았고, 형상위주의 토속 신앙을 믿는 이 지방 토착민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법시대가 되려면 적어도 기원후 300년 이후는 되어야 되기에 수로왕(서기 42~199년) 당시의 토착민들이 불교를 신봉하기에는 아직 때가 못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지방 토착민들 손으로 지은 사찰이 없는 것이지, 소위 수로왕과 허 왕후를 위주로 한 도래인들이 지은 사찰은 있다고 위의 기사는 말하고 있다.

 △허왕후 탑, 불교 최초 도래 증거

 또 그런가 하면, [然于時海東末 有創寺奉法之事~]를 [然于時海東 未有創寺奉法之事~]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海東末’에서 末을 ‘海東’ 뒤에 붙이지 않고 떼어다 ‘末’을 ‘未’로 바꾸어 ‘有創寺’ 앞에 붙여서 ‘未有創寺’로 풀이하면 “그러할 때 해동에서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들지 않았다. 대개는 상교가 들어오지 않아~”로 해석한다.

 설령 이렇게 해석해도 그 전체의 뜻은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금관성파사석탑’조의 기사에서 핵심 주어는 “불교의 상징물인 파사석탑을 허 왕후가 금관국에 가져왔다”는 것이고, 아울러 ‘토인’으로 표현되는 ‘이 지방 사람들’은 생소한 외래 종교인 불교를 믿지 않았기에 토착민 스스로가 절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일연스님 스스로가 독백처럼 말하고 있는 “대개는(蓋)”이라는 구절인데 여기에서의 뜻은 허 왕후가 올 때 탑이 오고 불교가 왔지만 그때에는 이 지방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이때가 상법시대 전이라 아마도 대개는 그들이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등의 일은 없었지 않았겠느냐 하고 일연스님이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末로 해석하든 未로 해석하든 결론은 허왕후가 직접 ‘탑’이라는 불교 상징물을 시집올 때 가져왔고 이때를 한국불교 최초도래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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