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7:08 (목)
결사반대
결사반대
  • 경남매일
  • 승인 2020.10.14 00: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태화 수필가/사회복지사
하태화 수필가/사회복지사

 아침저녁 지나다니는 작은 농촌 마을에 현수막이 하나 내걸렸다. `00공장 건설 결사반대`. 아마도 이 마을 어디엔가 공장을 지으려고 하니 주민들이 반대하는 모양이다. 농촌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면 자연환경 변화는 물론 업종에 따라 공해, 소음 등 주민 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에 이렇게 현수막을 내걸며 반대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해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에게까지 왜 이런 현수막을 보이도록 게시할까?

 `결사반대`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해 반대함`이라고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00공장 건설 결사반대`라고 하니 `죽음으로 공장건설을 막겠다`라고 하는 강한 반대 의사표시이리라. 그런데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자신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 있는 것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떤 공장이길래 그럴까. 현수막이 걸린 곳 근처에 작은 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학생들은 등하굣길에 그 현수막을 볼 것인데, 문제의 크기나 심각성에 상관없이 목숨을 거는 어른들의 모습이 어떻게 각인될까. 정말로 공장건설이 `죽음`을 초등학생에게까지 심어줘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일까. 이런 문구를 보고 자란 어린이가 성인이 되면 어떤 사고체계가 형성될까.

 사실 `결사반대` `생존권 사수` 등 이런 유사한 글귀는 우리 주변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죽음`이 들어간 극단적인 단어를 별 저항감 없이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이런 단어를 사용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인지, 아니면 그 단어에 들어 있는 구체적인 의미와 상관없이 그냥 강력한 반대 주장의 관용어로 사용하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사회현상인지는 모르나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뉴스가 이전보다는 많이 들린다. 얼마 전에도 유명 정치인과 운동선수가 이 길을 택했다. 자신은 이 선택만이 지금 처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제삼자가 볼 때는 안타까운 맘이 많이든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 복잡한 속내를 알겠냐마는 그래도 마음에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그냥 내려놓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이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언론에 보도되면 일반인들이 그를 따라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한다. 이 말의 유래는, 독일 문학가 괴테가 실연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된 후 소설 속 주인공인 베르테르와 같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르테르 효과가 일어나는 요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유명인의 자살에 대한 언론의 반복적인 노출에 의한 자극이고, 둘째는 유명인이 처한 환경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 현상이다.

 `노출에 의한 자극`은 방송 광고, 전단지, 현수막이 PR(Public Relation)이라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다. 여기저기 어렵지 않게 보이는 현수막의 `결사반대` `생존권 사수`라는 글귀를 자주 접하다 보면 죽음의 감각이 무뎌지게 되고 이로 인해 생명 경시의 풍조가 은연중에 스며들지도 모른다.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도 `죽음을 각오하고`를 내걸면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의식이 무감각해짐은 물론 나아가서는 죽음을 미화하는 것이 머릿속에 자리 잡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모든 문제의 해결에는 목숨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감정이 무의식중에 작동될지도 모른다. 문제가 되는 사안을 객관화시켜놓고 보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6ㆍ25전쟁 중의 고지 사수와 결사 항전은 아니지 않은가.

 죽음을 앞에 두면 초연해진다고 하는데 `결사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의 글귀는 너무 기세등등하여 무섭기까지 하다. 거리에 내건 현수막은 모두에게 노출되어 있기에 `결사반대`보다는 `절대 반대`로 조금 순화하거나 감성에 호소하는 문구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언어는 모든 행동과 생각의 시작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글의 사용, 한글날에만 강조해야 할 사항은 아닌 듯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