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7:55 (수)
주역 해석의 지름길
주역 해석의 지름길
  • 이광수
  • 승인 2020.10.11 2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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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세상사가 하도 답답해서인지 지인들 중 주역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더러 있다. 필자가 기고하는 주역관련 글을 읽고 주역해석의 지름길이 있느냐고 묻는다. 조금 깊이 주역에 들어가 보니 도무지 그 오묘하고도 미묘한 이치를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 탄식한다. 필자 역시 어떤 책을 얼마나 읽어야 비로소 통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아는 정도일 뿐이다. 실제 서(筮)를 해 나온 괘상을 가지고 속 시원하게 풀어서 길흉회린(吉凶悔隣)과 현상의 추이에 대해 명쾌하게 해석할 자신이 없다. 그저 서책에서 풀이한 괘상의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이다. 이는 아마 대부분의 학역자(學易者)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주역공부의 한계일 것이다.

3천 년의 세월을 거쳐 추기되고 확대된 주역해석은 현학적 관점의 의리역과 점서적 관점의 상수역이 양립하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그 해석 또한 자의적이고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동양역학자들은 사서오경과 중국24사 등 고전의 사례를 공자십익에 근거해 괘상의 의미를 해석한다. 반면, 후앙, 빌렐름 등 서양역학자들은 주로 문왕과 주공이 한나라 건립과정에서 겪었던 역사적 사건을 공자십익의 내용에 대입해 괘상을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주역을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함을 뜻하며 이로 인해 초심 학역자들이 겪는 혼란과 고뇌 또한 말할 수 없이 크다.

주역에 31년간 천착한 다산 정약용도 공자십익의 `설괘전`을 보면서 그 변통의 이치를 몰라 고뇌에 찬 세월을 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름대로 학덕의 경지에 이른 자들도 주역 앞에 서면 절벽 같은 장애물을 만난 것처럼 답답하다고 했다. 다산은 상수역으로 추이와 변역의 원리를 터득해 건장궁의 천문만호를 여는 황금열쇠를 얻었다고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주역이라는 깊고 오묘한 경지의 심연까지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는 의리학파인 왕필이 상수역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잡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의 주역해석방법론인 주역사법(周易四法)과 삼역지의(三易之義)는 기 상수역의 대가들이 적용한 것을 체계화 시킨 내용들이 많다. 다만 주자가 주역본의에서 변역을 논리적으로만 해석하고 실증적 서례로 해석하지 않았을 뿐이다. 다산은 경방이 처음 사용한 벽괘설인 12벽괘(소식괘)에 뇌산소과와 풍택중부 괘를 추가하여 벽괘의 특특비상지레라고 주창했는데 이는 이전의 주역해석에는 없는 이론이다. 변역의 절대원칙으로 정한 `12벽괘에서 60연괘로 갈 뿐, 60연괘가 12벽괘로 갈 수 없다`는 원칙을 스스로 깨뜨렸다. 다산은 주역해석이 막히면 괘변(괘의 공간적 위치이동)과 효변(음양의 변환)을 결합시켜 양호작괘법(兩互作卦法)으로 해석했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해석을 얻어내기 위한 자의적 괘상변화 방법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주역은 해석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산이 상수역의 관점에서 주역의 괘상을 해석하고 있지만 그 역해의 타당성과 역사적 근거확보를 위해서 고대서법의 복고에 천착해 3천 년의 세월을 거쳐 잘못 해석된 주역의 본질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춘추좌씨전의 고점서례를 인용해 추이와 호변, 중간효의 획괘인 호체, 설괘전의 해석을 고수한 물상 등 주역사해의 원칙을 세웠다. 또한 주역해석의 확대를 위해 상하괘의 위치이동인 교역, 상하 괘를 뒤집는 반역, 괘의 음양을 바꾸는 변역 등 삼종지의를 주역사법의 보조해석법으로 활용했다. 다산은 주역을 명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을 세움으로써 주역본의에서 원론에 그친 변역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주역사전ㆍ왕인) 이처럼 세상만사 문제점은 키워드만 잘 파악하면 시간과 노력, 끈기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다산연구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의 공포가 우리의 일상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주역은 인류재앙의 시종을 예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도 다산처럼 주역해석의 금약시를 쥐었다고 수지무지족지답지(手之舞之足之踏之)의 경지에 이를 때를 기대하며 호학호역(好學好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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