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의 시어처럼 ‘저마다 족한 얼굴로 와선’ 서로를 다독이고 노랗게 익는 바람 빛 따라 가을 길목 온정을 나누던 명절, 추석이 다가온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고향이 도시인 사람, 시골인 사람 할 것 없이 귀향의 설렘과 만남에 앞선 두근거림을 접고서 ‘멀리서 안부 전하기, 전화 한 통으로 정 나누기, 찾아뵙지 않은 것이 효도’라는 계도에 발맞춰야 하리라.
아쉬움을 접고 가족, 친지와 만남을 대신해 스스로를 만나 자기와 거닐어 보는 추석도 괜찮겠다.
고통을 견디며
자신을 도려내면
탯줄로 응집하는 선홍빛 울음
제 살 깎는 아픔이 아무렴 가뿐한 생이겠느냐
껍질을 벗어내야
탱탱한 살결 향긋이 빛나고
핏줄을 분리해야
혈맥은 비로소 울음 터뜨리지
울음 머금은 풋풋한 탯줄을 자른다
마침내 향기
저 해맑은 <자작시, 과일을 깎다>
어린 시절 명절에 과일 깎기 내기를 하곤 했다.
최대한 얇게 깎고 껍질이 끝까지 잘리지 않는 게 관건이다. 그동안 나에게 있어 과일은 늘 과일일 뿐이었다.
몇 년 전 사과를 대면했다. 사과를 깎던 날, 사과껍질이 긴 꼬리라고 여겼다가 문득 탯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아플까? 사과야, 미안해” 하다가 껍질과 속살 사이에서 튄 과즙 포말 향기에 감동이 솟구쳤다.
나한테 몸 맡긴 채 사과는 희망과 절망, 무엇을 느낄까?
순간 사과 깎는 일이 성스럽게 느껴져 깎은 과일 한 쪽도 예사로운 탄생 아니란 것을, 향기로운 삶을 위해선 스스로를 도려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올 추석에도 사과를 깎게 될 것이다. 도려낸 뒤 향기로운 기쁨 탄생하는 그런 추석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