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13:01 (화)
끝과 시작 ②
끝과 시작 ②
  • 백미늠
  • 승인 2020.09.15 0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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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늠 시인
백미늠 시인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끝과 시작` 중에서.

우리 집 안방에도 있는 자개농이 경희 집 안방에도 있었다. 우리 집 자개농은 솔가지에 99마리쯤 되는 학이 조각된 그림이었는데 경희 집 자개농은 여러 가지 꽃으로 조각된 그림이었다. 손으로 그림 조각을 만져 보다가 호기심에 살짝 열어 보았다. 갑자기 이불이 쏟아져 내렸다. 경희와 나는 놀랐지만 쏟아진 이불 더미에서 엄마 놀이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이불을 잘 개어 도로 넣었다.

다음 날이었다. 강으로 가기 위해 경희 집을 지날 때였다. 못됐구로 아무도 없는 남의 방에는 왜 들어와서 장롱은 뒤졌노 엉!! 어느새 경희 엄마가 내 앞에 떡 하니 서 계셨다. 예??? 아, 아, 아니라예. 경, 경희랑 같이 들어 갔어예. 어디서 거짓말하노. 경희가 들어 와보니 니가 장롱문을 열고 뒤지고 있더라 카던데!! 니, 다시는 우리 집에 얼씬도 마라. 알겠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게 이런 건가. 경희 엄마의 윽박 소리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경희 엄마만 보면 가슴이 팔딱거리고 입이 바싹 말랐다. 경희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내가 먼저 피했다. 시골을 떠나 마산으로 진학하며 경희와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경희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결혼하여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살다가 남편 직장 따라 베트남에 이민을 갔다고 했다. 바쁜 세월을 살면서도 언제가 경희를 만나면 그날의 억울함을 꼭 풀겠노라 다짐하고 있었다. 고향을 찾아 경희 집 대문 우편함에 연락처를 남긴 몇 달 후 잠시 귀국하여 고향에 왔다 간다고 경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30년 만의 해후였다. 그랬었나 난 모르겠는데 아이고 웃긴 다야. 역시나 경희는 기억을 못 했다. "그때 내가 안 그랬어요!" 지금이라도 너희 어머니를 찾아가서 말을 해야겠다고 했다. 우리 엄마 치매야 말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인제 와서 뜬금없이…. 뜬금없이? 그때 그 일로 나는 오랫동안 말까지 더듬게 되었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는걸. 지금이라도 나는 사과를 받아야겠어. 그래? 그럼 알겠다. 경희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지만 진정한 사과는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말했으니 됐어 마음 한 켠에 바람이 부는 듯 가벼워졌다. 10살의 가슴에 피었던 멍 꽃도 지워진 것 같았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며 자기 의지로 행동하자는 결심은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며 용기 있게 해결해 나가는 빈도는 많아졌다.

9월이다. 끝을 지나 다시 시작하는 계절이 되었다.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살아있음은 분명히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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