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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탕평책을 간한 담운의 상소문
영조의 탕평책을 간한 담운의 상소문
  • 경남매일
  • 승인 2020.08.24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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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시론이광수 소설가
매일시론이광수 소설가

담운(淡雲)은 이조 영조 때 문신 조명교(曺命敎)의 호이다. 숙종 때 사마시를 거쳐 대과문과에 급제했다. 영조 때 이조참의,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예문관 제학을 지낸 지조 있는 올곧은 신하로서 문장에 능했다. 그가 이조참의(정3품 당상관)재임 시 주역 천수송(天水訟)괘를 인용해 영조의 탕평책을 비판한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전하, 작년(영조 15년 1739년)부터 당쟁이 격렬해진 것 같습니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마음을 씻고 면려하여 신착(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고 계시지만 징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붕당이 한층 더 격렬해진 것이 어찌 명명(明命: 임금의 명)을 우러러 받드는 뜻이 되겠습니까. 당쟁이 중지되지 않으면 그 말류의 화가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질투하는 것은 편협한 여자들 보다 더 심하고, 다투는 것은 시정잡배보다 더하기 때문에 백가지 폐단과 천 가지 해독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됩니다. 하늘로 머리를 두고 땅을 딛고 있는 옳은 사람은 당성을 지닌 소인의 지경으로 귀착시키는 것을 달갑게 여깁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으며 점차 변하여 난역(亂逆)을 함부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갑과 을로 나뉘어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니 세도가 크게 변하고 인심이 이반되고 있는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이는 뭇 신하의 죄일 뿐만 아니라 임금의 권위가 확립되지 않고 요령이 정해지지 않은 데 연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붕당을 미워하면서도 끝내 탕평을 하지 못했고 공력을 허비하면서도 끝내 실질적인 공을 거두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희역(복희씨역)을 강하신 적이 있으니 신이 주역괘를 가지고 우러러 전달하겠습니다…중략”(생생주역 황태현) 이는 붕당의 폐해를 척결하려던 영조의 탕평책이 재임기간이 길어지면서 유명무실해지자 임금의 결단을 촉구하는 간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임금에게 이런 상소문을 올리는 정신(貞臣)이 적지 않았다. 탄핵과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에게 충간하는 직언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잘못되면 정적의 모함으로 탄핵당해 유배되거나 참형에 처해지는 비극을 맞았다. 연산군과 중종, 명종대의 사대사화가 그 대표적 사건이었다. 지금 대통령에게 이런 충간을 할 수 있는 올곧은 막료나 당료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바른 정사를 간쟁하는 사헌부대사헌(검찰총장)이 사법부개혁이라는 미명하에 형조판서(법무부장관)로부터 손발이 묶이는 수모를 당하고, 사간원대사간(감사원장)의 정상직무감찰과 소신발언을 두고 사퇴를 압박하는 당료들의 치졸한 행태가 가증스럽다. 280년 전 담운의 충간을 성심으로 수렴한 영조임금이 진정 현명한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담운 조영교는 탕평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주역 천수송괘의 해석으로 영조의 탕평책을 채근했다. “지금의 당쟁은 곧 주역의 천수송괘입니다. 송사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가운데 분수를 지켜 송사를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 길하다고 했고(불영소사 소유언 종길), 음흉한 일을 행하여 표면을 꾸미고 강건함을 믿고 이기기를 구하면 흉하다고 했으므로 성인(공자)이 송괘 효사에 모두 끝에는 길하다는 말을 붙였습니다… 지금 탕평하는 것은 곧 주역의 천지비괘에 해당합니다. 비괘의 도는 성신(誠信)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를 경계한 것으로 비인에 견준다 했습니다. 중정(中正)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위험에 처하여 머리가 없게 됨이니 유종의 미가 없게 된다는 뜻이라 어찌 오늘날 본받아 감계(監戒)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대신과 친하시고 쟁론을 없애 보합시킴으로써 함께 대도에 이르게 한다면 누군들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과 친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영조실록)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에 아첨한 간신과 목숨 걸고 간언한 정신의 행적은 시시비비를 가려 역사기록으로 남긴다. 인사유명 호사유피(人死留名 虎死留皮)라고 했다. 자신 사후 성명 삼자 추하게 남겨 역사의 공적이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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