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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敬)은 상대를 인정하는 존칭
경(敬)은 상대를 인정하는 존칭
  • 경남매일
  • 승인 2020.08.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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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

경(敬)은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 안을 곧게 한다 (君子 敬以直內)라고 한 구절에 나온다.

본래 경은 의(義)와 대비해 일컫는 말로서 경과 의라는 단순한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선 유학자 정암(靜菴) 조광조는 경(敬)으로 안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면, 안과 밖이 서로 길러질 것이고, 남명(南冥) 조식은 경(敬)의(義) 는 안으로 밝히는 것이 `경(敬)`, 밖으로 잘라내는 것은 `의(義)`다. 그러므로 경(敬) 의(義)는 바지와 저고리 같은 의미가 내포된다.

하루 생활에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매일 만나는 사람, 가끔 만나는 친구, 처음 만나는 사람, 업무차 만남 등 다양한 사람을 우리는 만나고 접하게 된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 표정, 악수하는 방법이 다를 뿐 아니라 대화의 첫 말머리마저 다르다. 오랜만인 사람, 차 한 잔 여유를 갖고 싶은 사람, 안녕으로 존경을 표하는 사람 등 단순히 존경하는 언어, 존경을 표하는 행위 자체가 존재를 인정하는 그 자체가 경(敬)이다. 즉 교수, 농부, 장꾼, 대표, 도사. 경찰 스님, 목사 차인 등 어떤 명칭이던 관계없이 존재를 가진 사람, 사회적인 자기 영역, 대화의 대상으로 확실한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행동과 눈빛의 방황이 다른 사람, 주저 기피는 아니지만 허술적 대상일 경우 대상은 될 수 있었으나 경은 아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초점은 무생물, 생물과 관계없이 사물에 대한 상대의 명칭이 존재한다. 원인이 존재하는 만큼 결과를 창조한다. 대상 명칭 자체가 경(敬)이며 마음 자체가 스스로 일어나게 되는 자연 원리로서 인간이 만물 영장으로 대접받는 것이 곧 존재가치를 명칭화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남명 조식 선생은 "내 마음을 넓었다가 내 마음을 닫으면 경은 스스로 나타난다. 경은 내 마음이 본성이고 그 자체가 사랑이라 했다"고 말했다. 내 마음에 짐작이나 결심이 없었는데 짝사랑하는 자체가 범죄이다. 상대가 차 맛이 좋고 영양적 가치가 높다고 천만번 설명할지라도 차 한 마시고 싶은 마음의 생각이나 감응이 아니 생기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상대적이다. 이 세상에 나만이 존재하는 것 아니다. 형제, 부모, 친구, 친척, 이웃, 선생 우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 혼자만은 경이 없다. 무엇이든 생각할 대상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경이다.

종교 신앙은 경 대상이 될 수가 있거나 아니 될 때도 있다. 경을 나타내려면 꼭 의로운 일이여야 한다, 곧 희생이다. 내 몸과 육체를 조건 없이 바칠 때 경이고, 사랑이며 정의이다.

이유 없는 죽음, 고발, 위장술은 경,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멋있는 희생, 흥 있는 봉사, 사랑스러운 베풂으로 덕을 창출한다. 지도자 학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덕을 키우려는 행동이며 그 본성은 경을 나타내는 행위이고 표현이다. 사랑은 희생을 만든다.

파스칼은 "마음을 보기 전에 얼굴을 보아라"고 말했다. 고급 화장품으로 얼굴을 가꾸기보다 본래 깨끗한 내 얼굴을 가꿔야 한다. 달마(達磨)의 얼굴은 흉하지만, 사람들은 달마의 마음을 격차없이 존경함은 경이다.

근래 대도시가 팽창한 인근 소도시에 땅값, 집세, 월세가 상한선 없이 상승한다. 따라서 졸부 역시 우후죽순으로 널어놔서 시차 없이 판을 친다. 사회질서는 인격 격차, 재산의 격차가 아니라 푹 넓은 존경심, 평상심이 더 필요하다. 인격화 사회는 서로 존경하고 친절로 대상을 이해하고 존경받는 경 존칭을 가꿔야 한다. 차 한잔은 그냥 마시는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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