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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 해마다 모란
해마다 5월, 해마다 모란
  • 경남매일
  • 승인 2020.05.12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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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늠 시인ㆍ수필가

책상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렸다. 슬쩍 보니 모르는 번호다. 모르는 번호면 잘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은 어떤 예감이 있어서일까 잠시 주저하다 연결했다.

"백미늠! 아 이제는 백 시인이라고 불러야겠네. 보내준 시집 `고래하품` 잘 보았어. 시집을 받고 너무 반가워 단숨에 읽었지. 오늘 아침 다시 한 번 읽고 전화를 하는 거야. 정말 시인이 되었구나!"

"선생님!" S선생님이시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입이 바싹 말랐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활기찬 음성 그대로였다. 재작년인가 우연히 선생님 소식을 듣게 됐다. 가까운 C교육청 교육장이시라 했다. 검색을 해보니 근황과 사진이 떴다. 어쩜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첫 시집을 들고 찾아 뵈야겠다` 진행이 안되던 시집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그렇다! 내가 시를 쓰고 시인이 된 배경에는 S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S선생님은 40년 전 면소재지에 유일했던 시골 중학교에 국어 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셨다. 남녀 공학이었지만 여중생들의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학교가 들썩거렸다. 대충 걸치고 다니던 교복도 달라지고 손거울과 빗은 필수가 됐다. 교실 복도로 선생님이 지나가실 때면 책으로 얼굴을 가리며 함성을 질러댔다.

선생님은 남다른 포스가 있었다. 다른 남자 선생님과는 다르게 머리가 길었는데 앞머리가 흘러내려 눈을 덮을 때마다 머리를 흔들어 빗겨 올리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 국어 담당이 아니어서 내 이름이나 얼굴도 모르실텐데 뭐` 여학생들의 과도한 관심과는 달리 나는 무심한 척 했다.

그해 5월이 됐다. 어버이날 행사 교내 백일장에서 내가 쓴 시가 장원으로 뽑혀 학교 게시판에 이름과 시가 나붙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며칠 후 한 학생이 교실로 나를 찾아 왔고 나는 교무실로 갔다.

"아! 네가 백미늠이구나. 시 참 잘 쓰네. 앞으로 잘 쓸 것 같아. 열심히 해봐!"

며칠 후 있을 학교 행사에서 입상한 시를 낭독하라고 하셨다. 전교생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낭독을 마쳤다. 이어서 한 여학생이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을 불렀다. 계속되는 두근거림으로 어지러웠지만 그날 처음 들은 그 노래가 입속에서 늘 맴돌았다.

여고생이 된 후 처음 맞이한 스승의 날, 수업 대신 모교를 방문해 은사님을 찾아 뵙는 과제가 주어졌다.

나는 음료수 한통을 들고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C중학교로 향했다. 졸업한 지 고작 두세 달 만인데도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무척이나 낯설었다. 눈부신 5월의 햇살과는 다르게 교무실은 어두컴컴했다.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다가 S선생님이 앉아 계신 책상으로 갔다. 아마도 선생님이 먼저 어떤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는 지금 17살 같아요. 앞으로 어떤 순간도 지금보다 좋을 수는 없을 거에요! 17살에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어요."

"하하하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나보네. 입시로 경쟁이 치열한 학교에서 적응을 잘 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선생님은 의자를 돌려 앉으시며 말씀하셨다. "여고 시절… 참 좋을 때지. 18살도 좋고 19살도 좋고 대학생이 되면 더 좋을테고."

"지금부터 너는 해마다 해마다 더 좋아지고 더 이뻐지고 더 좋게 변해 갈 거야. 앞으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니까."

그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온 후부터 나의 일상은 더 선명한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백미늠, 지금까지 국어선생님으로 내가 얼마나 많은 시를 가르쳤고 얼마나 많은 시집을 받아 보았겠니. 하지만 솔직히 너의 시집 `고래하품`이 제일 좋았단다."

"백미늠 이란 이름이 시인이 될 이름이었네. 내가 손녀딸을 얻으면 미늠이란 이름으로 지을까 해. 하하하."

시는 바로 그 사람이다. 선생님은 내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을까? "시를 읽는 동안 시가 너를 구원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가 제 기능을 오롯이 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축하한다! 제 2시집, 제 3시집을 기다리마."

시를 쓴다는 것. 시인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 시집을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효용이 있을까. 후회와 회의감으로 어수선했던 마음이 답을 얻은 듯 편안해졌다.

선생님은 10대의 나에게, 50대 중반에 서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진심을 담은 말로 용기를 주셨고 오지 않는 날들에 대한 기대와 꿈을 주셨다.

그날 나는 40년 은사님과의 통화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선물로 받았다. 앞으로 더 좋은 삶으로, 더 좋은 시로 보답해야 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 독자가 톨스토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 톨스토이가 말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든가, 좋은 책을 만나든가.`

다시 모란꽃 피기 시작하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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