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8:25 (금)
눈망울에 비친 소박한 소망
눈망울에 비친 소박한 소망
  • 경남매일
  • 승인 2020.03.1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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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ㆍ수필가 정지우

아주 오래된 일이다. 어머니와 내가 철거민이 이주한 곳에 부식을 겸한 가게를 운영했을 때 일이다.

가게가 비좁아 상자를 둘 곳이 없어 가게 담벼락에 술, 음료수 상자를 쌓아 두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상자가 하나둘씩 없어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몽땅 달아나버렸다. 그 당시 상자 가격이 1천500원. 그걸 모아서 월 말이면 공과금에 보탬이 됐는데 속상하고 괘심해서 어머니와 난 꼬박 겨울밤을 세우며 범인을 잡았다.

범인은 아주 덩치가 큰 17살의 지적 장애인이었다.

묻지도 않는 자백을 술술 털어놓았다. "라면이랑 과자 빵도 가져갔어요"라 말한다. 언제부터냐고? 1년이나 됐다 한다.

어떻게 1년이나 도둑을 맞고도 모르다니 허술한 장사를 한 내게 자책하며 아이를 앞세워 부모를 만나러 간 자리. 3평도 안 되는 단칸방에 중학교 3학년 여동생이랑 4식구가 생활필수품이라고는 찌그러진 양은 냄비 몇 개가 전부인, 가구라고는 나무상자 위에 쌓아둔 이부자리와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보따리 몇 개가 전부였다. 이미 사늘하게 식어버린 연탄 아궁 위에 올려진 냄비와 부뚜막의 라면이 이 집식구들의 아침 준비였다.

어머니마저도 지적장애인이셨다. 24시간 동안 누군가 함께 하지 않으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식구들의 근심거리를 만들고 집에 불을 내든지 하는 등 보호가 필요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수저 만드는 일을 하시는 분이지만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맞춰 야간 출근을 하셨다. 아들과 아내 두 장애인을 두고 직장을 갈 수 없는, 그것도 야간작업이 필요한 때만 출근을 하시는 사정. 언제나 아침이면 동네 골목길을 쓸고 계셨던 성실하시고 착한 분이었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이 죄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사는 분이셨다.

소문엔 부인이 주인집 딸이었는데 오갈 데 없는 본인을 거둬준 주인 어르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라는 미담이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아이를 용서해달라고, 심성은 아주 착한 아이인데 애비가 잘 먹여 주지 못하니 배가 고팠던 모양이라고 대신 벌을 받겠다며 월급 타서 조금씩 갚아 나가겠다고 애걸하는. 숨이 막히는 순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아버지의 눈물! 걱정 말라고 다독이며 돌아서는 내 발등에도 눈물방울 하나. 아린 가슴에 새벽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다음 날 하얀 컬러가 눈부시도록 단정한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여학생이 아버지가 전해달란다고 신문지에 돌돌 말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하나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실타래처럼 엮은 기법의 수저 4벌이 내 눈을 의심케 했다. 너무 아름다웠다. 자존감이 담긴 희망의 선물이었다.

난 아이에게 물었다. "무엇이 되고 싶냐?"

공무원이 소망이라고.

"공무원이 되면 밥걱정은 안 해도 되고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환경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 개나리꽃 향이 스친다. 하지만 혈육이라는 고리. 그 아이가 지고 갈 삶의 무게가 작은 어깨에 너무 무거워 보여 안 서러워서 가슴이 아렸다.

그 뒤 난 아무도 몰래 가끔 연탄과 라면이랑 간식거리를 챙겨 그 집에다 놓고 왔지만 그 집식구도 나도 모른 체하며 서로의 자존감을 지키며 지냈다. 가끔 길거리에서 만나면 환한 미소로 반기는 소녀의 그 눈빛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을 훌쩍 떠나버린 그들. 가끔은 궁금하다. 그 소박한 소망, 공무원은 됐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겨울밤 구세군 종소리가 들리는 이런 날이면 그 소녀의 초롱초롱한 눈빛 환한 미소의 개나리꽃 향이 유독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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