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성 전 하동읍장 행적ㆍ가족사 100년 만에 ‘햇빛’
황학성 전 하동읍장 행적ㆍ가족사 100년 만에 ‘햇빛’
  • 이문석 기자
  • 승인 2020.03.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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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독립운동가 정부서훈 추진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활약

독립운동ㆍ인재양성에 일생 바쳐
독립운동가 황학성 전 하동읍장의 정부서훈이 추진된다.

 

하동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한 전 하동읍장 황학성(黃學性(成)ㆍ1896∼1974) 선생의 드러나지 않은 행적과 가족사가 100년 만에 하동군과 한 재야사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하동군과 2018년 3월부터 군내지역 미발굴ㆍ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황학성 선생의 손녀 황현숙(61ㆍ전 하동여고 교사) 씨가 제공한 자료와 자체 발굴 자료에서 선생의 가족사에 얽힌 사연을 최근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황학성 선생은 1919년 3월 하동에서 손위 처남 김응탁(金應鐸ㆍ1894∼1950ㆍ건국훈장)과 박치화(건국훈장)ㆍ이범호(대통령표창)ㆍ정낙영(대통령표창)ㆍ정희근(대통령표창)을 비롯한 12명과 은밀히 모여 하동읍내 이병홍(양보면) 선생의 사무소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이후 3월 18일 하동장날 장터에서 하동ㆍ광양 지역민 1천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펼쳤다.

이 독립선언서로 인해 하동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총 17회가 일어났으며, 영ㆍ호남지역 만세시위를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로 지정돼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방 유일의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황학성 선생의 장인 김의현 호적등본, 이 등본에는 2남 김응탁과 장녀 김초아(황학성의 처)가 나온다.

 

◇여섯 처남, 중국 넘나들며 독립투쟁=

이 같은 일로 황학성과 함께한 서명자 대부분이 일본경찰에 체포돼 갖은 고초를 겪었다.

선생의 손위 둘째 처남 김응탁(적량면)과 만세운동을 비밀리에 도운 손아래 셋째 처남 김승탁(金承鐸ㆍ1900∼1943)은 체포돼 고초를 겪은 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큰처남 김경탁(金景鐸ㆍ1890∼?)과 넷째 김중탁, 다섯째 김성탁, 여섯째 김정탁은 국내와 중국을 넘나들며 독립자금 모집과 민족문화 운동을 펼쳤다.

김경탁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출신 독립운동가 방정환ㆍ이승훈ㆍ안희제ㆍ윤주석 등과 한시회(漢詩會)를 열며 시국을 논했다.

이 같은 사실은 ‘윤주석 선생 유고집 섬강춘작(고려대학교 부산교우회, 2009)’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다섯째 처남 김성탁(金聖鐸ㆍ1910∼?)은 황학성의 집에서 20년 가까이 기거하며 선생의 독립운동을 밀착해 도왔다.

중국에서 활약한 둘째 처남 김응탁은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손아래 처남 김승탁은 만주에서 조선인 학교를 설립, 민족 해방운동을 이끌다 1943년 7월 24일 일본군에 의해 피살 순국했다.



◇만주 조선인 학교 건립 거액 지원=

황학성은 처남 김승탁이 설립한 조선인 학교에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는 등 민족학교 운영을 적극 도왔다.

김승탁은 2019년 11월 순국선열의 날 건국포장을, 김응탁은 이번 3ㆍ1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 받았다. 이로써 두 처남이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보다 앞서 황학성은 대한제국 때 일본으로부터 빌려 쓴 외채 1천300만 원을 갚기 위해 벌인 거족적인 애국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적극 지지하며 하동에서 여종엽ㆍ경엽 형제와 황두연 등과 모금운동을 벌였으나 통감부의 압력과 일진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활동 등으로 일제의 탄압이 지속되자 처갓집 장인어른은 집안을 어지럽힌다며 참다못해 시집간 선생의 처 김초아(金初阿)와 선생의 동지였던 손위 처남 김응탁을 호적에서 파 버렸다.

이름 자체를 아예 호적등본에서 지워버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을 끊은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선생의 장인어른 김의현(金義玹)의 당시 호적등본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등본에는 ‘長男 景鐸(장남 경탁)ㆍ參男 承鐸(삼남 승탁)ㆍ貳女 二阿(2녀 이아)’의 순으로 등재됐다. 2남과 장녀는 빠졌으며, 곧바로 장남에서 3남 그리고 2녀로 표기됐다.

하지만 황학성의 호적등본에는 ‘妻(처)의 父母(부모)에 金義玹(김의현)ㆍ趙昆良(조곤량)’이 등재돼 있다. 김응탁의 등본도 마찬가지다.

정재상 소장은 선생의 장남 황규현(100ㆍ서울 거주) 전 하동고등학교 교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전하며 “부친(황학성)과 외숙(김응탁ㆍ김승탁 6형제)들이 일제와 맞서 싸움으로써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외가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핍박 속에 살아야 했다”며 “그로 인해 외조부는 우리 가족의 외가 출입을 막아 모친(김초아)은 친정에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선생의 장인은 자식들에게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을 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법서사와 큰 미곡상회 운영하며 서민의 법률지원과 흉년 시 구휼에 앞장=

선생은 191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부기학교를 수학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20년대부터 40여 년간 사법서사와 대형 미곡상회를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어려움을 당한 백성의 법률지원과 흉년 시 구휼에 앞장섰다.

선생은 해방을 맞이하자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하동군지부의 결성을 위해 이상경(하동 제2대 국회의원)ㆍ이보순(하동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2인 중 1인) 등과 각 읍면 분회를 조직했다.

주요 인물은 하동읍 윤주석(백산상회 임시정부 독립자금 총책, 해방 후 하동고등학교 교장), 악양면 정수봉(초대 민선 악양면장), 적량면 이원모, 화개면 김병춘, 진교면 윤재환, 양보면 김순기, 금남면 신재우, 옥종면 양재영이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2월 민족주의 정당들로 구성된 국민운동추진단체로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金九)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 발족한 단체다.

또한 선생은 채소정, 서경녀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하동군지부 조직에도 힘을 보탰다.

이와 함께 1946년 5월 4일 대한독립촉성 중앙협의회 총재 이승만이 하동초등학교에서 군민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반탁과 자유 독립에 대해 연설을 위해 왔을 때 윤주석과 함께 수행했으며, 백범 김구와도 교류하며 시국을 논했다. 선생은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하동읍장과 하동육영원 이사장으로 하동중ㆍ하동고 설립… 인재양성 헌신=

선생은 이후 1950년부터 2년 6개월간 제2대 하동읍장을 역임했으며, 1952년 하동육영원 재단 이사장을 맡아 하동중학교와 하동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하며 인재양성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선생은 1974년 12월 27일 하동읍 광평리에서 향년 78세로 생을 마쳤다. 선생 부부의 묘소는 적량면 고절리 선영에 있다.

자료를 제공한 손녀 황현숙 씨는 “3ㆍ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조부의 의로운 행적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가 추진하는 독립운동가 재조명에 함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상기 군수는 “독립운동과 인재양성 지역사회를 위해 일신을 바친 황학성 선생의 숭고한 뜻이 계승될 수 있도록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과 함께 정부서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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