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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맹어문정책의 패착
한자문맹어문정책의 패착
  • 경남매일
  • 승인 2020.02.2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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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광수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동남아와 더불어 한자문화권에 속하지만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해 우리의 독자적 문자를 갖게 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된 지금, 정작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허점 투성이의 어문 정책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중근세사에서 한국만큼 많은 전적(典籍)을 양산한 국가는 드물다. 이조 500년 동안 생산된 전적 중 일부는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학자이자 국가 관료였던 선학들이 남긴 공ㆍ사적 저작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다. 모두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할 가치가 있는 보물 같은 사료들이다. 개혁 군주 정조가 펴낸 저작물을 편찬한 `용재전서`나 다산 정약용의 저작물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만 해도 동서양 어느 나라 개인 저작물로도 비교 불가능한 방대한 기록물이다.

필자가 만년에 이르러 인문학의 보고인 동양 전적에 뒤늦게 눈을 뜨고 주역(周易) 등 고전을 접하면서 느끼는 통한의 유구(有咎)는 한글세대로 태어나 한문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양 문물의 학습에 경도된 우리는 동양의 인문학은 고리타분한 형식주의에 불과한 탁상공론으로 폄하해 왔으니, 인문적 사고의 천착이 부족했음을 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과학 문명을 꽃피운 서양 문물의 우수함에 매료돼 우리 것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시작되는 서양 문물의 학습과 탐구로 우리의 골수 채우기에 급급해 왔다.

그러나 난해하기로 소문난 주역에 입문하면서 연관된 동양의 역사와 철학을 섭렵해보니 지난날의 우리나라 어문 정책이 한참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됐다. 동양철학의 진수인 사서육경(四書六經)과 그 전적들을 해석하고 비판한 우리 선현들의 전적에 찬탄을 금할 수 없지만, 한자를 정규과정으로 이수하지 못해 한문투 문장 독해의 어려움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니 후회막급이다. 진작 젊은 시절에 독학으로라도 영어 공부에 몰입하듯이 한자를 익히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현사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심정으로 내 인생의 여락(餘樂)을 동양 고전 읽기로 보내려니 한문투 문장 독해의 난해함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한자 독해의 해법을 찾기 위해 서점을 기웃거리며 한자 문법책을 몇 권 샀지만 뾰족한 묘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듯이 내 눈을 혹하는 한자 해석 전적을 찾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의 빛을 보게 됐다.

한양대 명예교수인 윤재근 박사가 펴낸 <맹자> 해설서로 한자투 문장 해독의 물미를 트게 해 줬다. 상하 두 권에 무려 3천500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전혀 지겹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한자투 문장 해석의 어려움은 실사와 조사, 허사(어조사)를 어떻게 잘 연결해서 해석하느냐에 달렸다. 윤 박사는 조사와 허사(어조사)의 해석은 한문 문장 앞뒤 전체의 맥을 잡아야 가능하다며 그 용례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특히 중고 시절에 필수 이수 한 영문법을 한글세대가 이해하기 좋게 적용해 설명하니 한결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는 중국어와 영어의 어순이 비슷한 점에 착안한 것이다. 한문 초보자도 <맹자> 해설서의 자습으로 한문투 문장을 쉽게 독해할 수가 있다. 그는 우리나라 어문 정책에 대해 "지난 세기 후반 우리가 범한 문자 전략의 착각 중 한문 과정을 정규과정에서 삭제해 버린 것은 심각한 과오"라고 했다. 그리고 극동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 간직하는 정신은 공맹과 노장에서 비롯했다면서 지금 우리는 서구문화 종속의 아류주의에 빠져 있다고 했다.

우리의 옛 전적들은 비록 한자로 돼있지만 중국 것이 아닌 우리 민족 고유의 유산이다. 한자 문맹의 까막눈이 돼 조상의 묘 비문조차 읽지 못하고, 선현들이 남긴 수많은 전적들이 서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글전용 어문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라도 한글전용과 병행해 한자를 초등고학년부터 대학까지 필수교과로 지정하는 등, 한자 문맹 퇴치를 위한 적극적인 어문정책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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