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판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전성시대를 지나 내로남불의 무감각 시대를 맞고 있다. 내로남불만큼 편리한 도구는 없지만 예전엔 내로남불을 거들먹거리면 얼굴에 작은 수치심이 그려졌지만 요즘은 내로남불을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더 높이 쳐들고 정의로운 척한다. 내로남불의 무감각 시대는 우리 사회가 위기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현 정권 인사들은 전 정권 인사를 나무라면서 온갖 정의의 잣대를 대고 차가운 골방까지 몰아넣고, 지금 동일한 범죄를 재현해 놓고 되레 뻔뻔스럽게 양의 머리를 들이대고 있다. 내로남불의 도구를 상황 회피 수단 정도가 아니라 불의를 정의로 바꾸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울산시장 선거 개입 공소장 제출을 거부하면서 `잘못된 관행`, `사생활 보호`를 내세웠다. 추 장관은 탄핵정국 당시 검찰 공소장을 근거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공동정범, 피의자로 몰아세웠다. 내로남불의 산을 넘어 갑자기 정의의 화신이 됐다. 추 장관의 정의와 평등을 치장한 말투를 되새기면서 "최순실, 정유라한테는 어떻게 했는지" 그때를 떠올려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정의를 목숨으로 여겨야 하는 법무부 장관이 정의를 상황 논리로 몰아넣었다. 내로남불의 극치를 넘어 내로남불 무감각의 전형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가 `조국의 강`을 건너면서 내로남불을 숱하게 봐 와서 되레 이런 상황을 보는 사람들이 무감각할 지경인데 이 짓거리를 하는 주체는 더 무감각하다.
한나 아렌트가 내놓은 `악의 평범성`을 되새기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 덫에 걸릴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상황에서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대체적인 도리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인자한 미소를 지닌 평범한 사람이지만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사실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는 사람을 살해할 의도는 없었고 자기 일에 충실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한 의도가 없었다 해도 생각이 없었다. 사상에 마취되든 사유에 마취되는 인간은 무감각으로 악을 저지를 수 있다. 심지어 정의의 탈을 쓰고 많은 사람을 죽음의 강에 빠트릴 수 있다. 인간의 양면성이다.
내로남불의 무감각이 널리 퍼져있으면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정의의 강은 썩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회 구성원에게 정의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사고의 무능함까지 안겨준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사람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사람이 죽음의 강을 건너가게 해놓고 임무 완수의 자부심을 느끼는 죽음 같은 모순을 잡았다. 내로남불의 무감각과 악의 평범성이 끼치는 해악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우리 사회에 특히 정치판에 내로남불의 무감각이 걷히지 않는다면 정의는 한낱 상대 논리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
내로남불의 무감각 시대에 4ㆍ15 총선은 진실 게임이 아닌 거짓 게임이 될 것이다. 악의 평범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내로남불의 무감각 멍에를 씌우는 정치적 행위에 민감하게 맞서야 한다. 하지만 총선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내로남불의 무감각을 부추기는 행위가 더욱 기승을 부릴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