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6:18 (목)
강성갑 선생의 한얼 정신
강성갑 선생의 한얼 정신
  • 경남매일
  • 승인 2020.02.06 2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해시의회 의원(사회산업위원장) 김종근

 강성갑 선생은 1912년 6월 21일 경남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에서 출생해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2일 낙동강 수산교 아래에서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쓴 채로 억울하게 총살당하기까지 38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우리 김해 진영 땅에 많은 발자취와 함께 그 정신을 남겨주고 가셨다.

 오늘 강성갑 선생님의 일대기와 그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봄으로써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의 꿈과 현실을 실현하는데 정신적인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강성갑 선생님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출생했으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식 교육을 받았고 당시 지식층의 시대적 사명감과 그의 이념을 교육을 통해 성숙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은 "신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는 신의 뜻"임을 깨달아, 귀국해 부산의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러한 학문적, 신학적 발판은 참된 기독교인의 삶을 실현함과 동시에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라는 당시 지식인의 고뇌와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기간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얼 중학교(복음 중등 공민학교) 설립 이념에 잘 표현돼 있다.

 "좌도 없고 우도 없다. 단지 사랑하는 내 겨레가 있을 뿐(중략) 미국도 소련도 우리의 역사적 과업을 맡을 자는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몇 세대를 거치더라도 우리의 문제로 남는다"고 역설하면서 농촌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 운동을 통해 새 나라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그는 당시 사회 경제의 기틀이 농촌에 있으므로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직접 농촌으로 가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식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진영 교회 목사직과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등교육보다는 현실적인 생활에 직접 적용 가능한 중등 교육과정과 함께 인간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과 가치의 실천을 위한 교육을 우선적으로 실시코자 했다.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애토(愛土)ㆍ애린(愛隣)ㆍ애천(愛天) 정신을 가지고 한 가지 이상의 지식과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교사(校舍) 건축을 위해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이 밤낮으로 힘을 모아 흙벽돌을 사용해 창조적인 자립의 사례가 됐다.

 교육에 있어서는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무엇보다 청소ㆍ청결ㆍ정돈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정신 및 신체의 작업을 중심원리로 행하는 노작교육(勞作敎育)을 중시했다.

 그리고 성냥공장, 기와공장, 목공장 등의 과정을 개설하고 이를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부르게 했고 월급 역시 교장인 자신과 동등하게 지급해 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도 이러한 이념적인 논쟁은 완전히 우리 사회에서 바로 잡히지 않은 채 21세기를 지나고 있다.

 여전히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도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강성갑 선생님이 활동할 당시 다수를 차지하는 국민의 경제생활의 근거지는 농촌이었고 농민이었으나 21세기인 지금은 그 주체가 농촌이 아니고 도시로 변했고 산업사회, 서비스 사회에 종사하는 시민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이를 계몽하고 계발하기 위해서는 시민의식 교육이 필요하며 역사 주체 의식을 고취할 뿐 아니라,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실천하고자 하는 의식은 변함이 없어야 하고 새 나라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강성갑 선생님의 정신을 통해 지금 우리들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러한 강성갑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수의 김해 시민과 국민들이 꿈을 이루고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조그마한 노력이나마 김해시의회를 통해서 함께 이루고자 노력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