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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미각회해 - 사라진 조선의 독상 문화
김영복의 미각회해 - 사라진 조선의 독상 문화
  • 김영복
  • 승인 2019.12.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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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일본강점기 이전 조선의 밥상은 1인 1상을 받는 독상 문화였다. 당시는 양반가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독상 문화였다.

 독상 문화는 수많은 사료에 그림과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그릇의 반찬을 공유하면서 먹지 않았다.

 한편 당시의 그릇은 사발 문화와 주발 문화가 주종을 이뤘다.

 한식(寒食) 때 그릇괘에 있던 사발(沙鉢)을 꺼내 여름내 사용하고, 그릇괘에 주발(周鉢)을 기왓장 가루를 지푸라기에 묻혀 닦아 넣고, 추석에는 사발을 그릇괘에 넣고 그릇괘에서 주발(周鉢)을 꺼내 겨우내 사용했다.

 옛날 서민은 밥, 국, 김치, 간장 이외의 반찬을 담은 접시가 셋인 5첩에 조치가 1개, 7첩에는 조치 이외에 찜(갈비, 닭, 생선, 달걀 등)을 해 두 가지를 겸해 차렸다. 7첩은 최상급 상차림이라는 뜻으로 `7첩 반상에 쌍조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9첩의 화려한 반상까지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4년(1422년) 5월 17일 `태상왕의 수륙재(水陸齋)에 `종친과 본조의 관원은 모두 전일에 정한 숫자에 의하고, 대언(代言) 1명, 각전(各殿)의 속고치[速古赤] 합 8명, 별감(別監)ㆍ소친시(小親侍) 합 10명, 행향사(行香使) 및 종친(宗親)ㆍ본조(本曹)의 당상(堂上)ㆍ낭청(郞廳)과 축사(祝史) 1명이 참예하는데, 대언과 속고치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ㆍ면ㆍ병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나온다.

 1891년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공납 업자 지규식(池圭植)의 `하재일기(荷齋日記)`에 사기색낭청에 칠첩 반상을 납품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독상 문화가 바뀐 것은 일본강점기 말기부터이다.

 1936년도 동아일보 기사에서 외상을 폐지하고 한 상에서 같이 먹으라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시대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과 수탈이 가장 심하던 일제 말기이며, 왜 일제는 외상을 폐지하고 겸상을 유도했을까? 이 신문에선 남는 반찬 처치 등의 이유를 들고 있지만, 과연 그 당시에 궁핍한 삶을 살았던 서민들이 반찬을 얼마나 버렸을까?

 오히려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다.

 당시에도 반찬을 남기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한국의 반찬이란 것은 식사 때마다 만들지 않고 한번 만들어두고 그냥 꺼내기만 해서 먹는 것들이 많으니 준비하기 더 편할 수도 있다.

 일제 말기에는 온갖 자원을 수탈해가면서 민가의 놋그릇, 수저까지 다 뺏어가던 시절이었다. 민가의 온갖 물건들까지 다 빼앗아가는 바람에 필요한 식기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그를 위한 핑계이자 합리화가 독상 문화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런 일본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식기가 냄비 등이 더 부족해고 나눠 담기도 민망한 양의 음식만이 있자 한국의 독상 문화는 사라지고 겸상과 한 식기의 반찬을 같이 먹는 풍습이 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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