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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미각회해 - 청산되지 않은 외식문화의 일제 잔재
김영복의 미각회해 - 청산되지 않은 외식문화의 일제 잔재
  • 김영복
  • 승인 2019.12.1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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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50여 년간 필자는 우리 전통음식과 향토음식을 찾아 전국을 누비며 자료 정리를 하다 보니 반만년의 역사와 함께 검증돼 내려온 우리의 음식문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그 문화가 어떻게 해서 사라지거나 잃어버리고 왜곡됐는지를 연구하다 보니 자신의 나라에 대한 우월감으로 자기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이 다른 나라보다 우월한 것이라 믿는 배타주의의 또는 국수주의자로 몰려 논쟁을 불러온 적이 있다.

 일본과 지소미아 등 외교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외식문화 언저리에 아직도 친일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어 식생활 문화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한국에 진출한 일식집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의 활어를 파는 횟집이나 쇠고깃집 등의 메뉴판에서 자주 만나는 음식명에 `사시미(sashimi,刺身)`, `와사비(wasabi, 山葵)`, `아나고 (穴子, あなご)`, `육사시미` 등을 볼 수 있으며, 특히 횟집과 복집에서는 `지리 (ちり)`를 많이 쓴다.

 그러나 고려 중기 학자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회(?)를 주제로 쓴 시(詩)가 여러 편 실려 있다.

 "붉은 생선으로 회를 쳐서
  반병 술 기울이니 벌써 취해 쓰러지네
  어부가 하는 말이
  술 있으면 안주 투정을 어찌하리
  여울에 있는 고기를 잡아 회를 치면 된다 하네"

 사시미의 종주국이라는 일본에서 `사시미`라는 단어는 1399년 발행된 『영록가기』라는 요리책에 처음 나온다. 민물고기인 잉어를 회로 뜨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사시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1399년은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제2대 정종 임금이 즉위하던 해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회의 역사는 문헌에 등장한 기록으로도 일본보다 150년 이상 앞선 시기이다.

 고려 말 충신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좋은 고기 잡아 눈발처럼 잘게 회 치고, 막걸리 불러와 거나하게 취했네"라고 노래했다.

 조선 초기의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저서 『동문선』에서, "흰 막걸리와 붉은 회가 꿈에도 그립구나. 잠방이 차림으로 물에 텀벙, 그물을 드니 퍼덕이는 은빛 비늘. 비늘 떼고 회로 저며 수초로 양념한다"고 했다. 그는 또 `붕어회`라는 제목의 시에서 "서리 내린 차가운 강 붕어가 통통 살쪄 / 칼 휘두르니 하얀 살점 실처럼 흩날리네 / 젓가락 놓을 줄 몰라라 / 접시가 이내 텅 비었네"라고 노래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68권, 7년(1476) 6월 12일(계미) 5번째 기사에 `충청도 청주 사람인 효자 경연(慶延)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오니,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 인견하고 경연이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는 병이 나서 드러누운 지 1년 남짓 됐는데, 죽조차 거의 먹지 못하니, 지쳐서 여윈 나머지 뼈가 드러나게 됐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하늘에서 비가 내려 물이 앞개울에 넘쳐흐르는데, 신의 아비가 갑자기 말하기를, `생선회를 맛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고 기록됐으며, 17세기 초, 조선 숙종 때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지은 『산림경제』에 회(膾)의 요리법으로 `생선의 껍질을 벗기고 살을 얇게 썰어 얇은 천으로 물기를 닦아낸 다음 생강이나 파를 회 접시 위에 올려 곁들여 먹고, 양념으로 겨자를 쓴다. 여름에는 얼음 위에 올려 먹는다`고 적혀 있으며 회를 먹고 소화가 되지 않을 때 `생강 즙 한 되를 먹으면 바로 소화가 된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회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우리 조상 대대로 먹어 온 음식 습관이오. 문화인데, 굳이 회를 `사시미`라 부를 이유는 없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육회까지 굳이 `육사시미`라고 불러야 하는 일부 외식업체의 의도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복국 역시 조선 제17대 왕(1649~59 재위) 효종의 부마 정재륜(鄭載崙)이 숙종 27년(1689)에 쓴 『동평위공사문견록』에 보면 조선의 임금 인조가 `복백탕(鰒白湯)`을 즐겨 드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코 복국이 일본에서 유래된 것처럼 우리의 음식문화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지리는 일본어 `汁(じる)` `즙`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도 역사적으로 복백탕이라는 훌륭한 음식명이 있었고, 이를 즐겨 먹었다. 순우리말로 한다면 `복 맑은 탕`으로 고쳐 부르면 될 것이다.

 아나고(穴子, あなご) 역시 정약전(丁若銓)이 1815에 쓴 『자산어보』에 따르면 `아나고`의 우리나라 한자어 이름은 `해대리(海大驪)`이며 속음으로는 `붕장어(硼長魚)`다` 라고 돼 있다. 여기에서 `붕(硼)`은 취음(取音) 표기이므로 한자어가 아니다. 이 `붕장어`는 사전에 표준어로 올라 있으며, 국립국어연구원이 1991에 편찬한 『국어 순화 자료집』에도 `아나고 회`는 `붕장어 회`로 고쳐 쓰도록 했다.

 `와사비` 역시 `고추냉이`로 부르면 될 것을 굳이 일본어로 표기하는 것은 아직도 친일적 사고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일식집이 아니라면 잘못된 일본어 표기는 한국어 표기로 바꿔 놓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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