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4:58 (토)
[기획탐방] 덕천강 물에 마음 씻은 청렴 정신 산청 곳곳에 흘러
[기획탐방] 덕천강 물에 마음 씻은 청렴 정신 산청 곳곳에 흘러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9.11.25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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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스승 찾는 발길 남명 조식 선생 유적지
지리산의 굳건하고 의연한 모습을 닮기를 바란 남명 조식 선생은 노년에 산청 덕천강변에 거처를 옮기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사진은 남명 선생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남명기념관` 전경.
지리산의 굳건하고 의연한 모습을 닮기를 바란 남명 조식 선생은 노년에 산청 덕천강변에 거처를 옮기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사진은 남명 선생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남명기념관` 전경.

덕천강변에 `산천재` 짓고 후학 양성 지리산 천왕봉 사랑 시에서 잘 나타나
탄생 500주년 기념 `남명기념관` 생애와 관련된 유물 등 발자취 느껴
`실천중시 사상` 백성 위한 마음 전제 매년 가을 열리는 `남명선비문화축제`
3천여명 넘는 관광객 찾아 홍보 톡톡

"그대는 요즘의 선비들을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며 이름을 도둑질하고 남을 속입니다."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말씀이다. 
고개를 들면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보이고 주위를 둘러보면 지리산 중산리 계곡과 대원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로 가득한 덕천강이 흐른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이 `무릉도원`이라 칭송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광이다.
지리산 천왕봉이 새하얀 눈 모자를 쓰기 시작한 11월. 평생을 맑고 깨끗한 품행으로 청렴을 실천한 참 스승, 남명 조식 선생 유적지를 찾았다.
최근 남명 선생과 인연이 깊은 경남 도내 많은 지자체들이 선생 사상과 선비정신을 널리 알리고 제대로 배우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감히 선생의 발자취를 뒤따라 봤다.

남명 조식 선생 기념관 전시실 모습. 전시실에는 선생 생애와 관련된 유물 및 후학을 기록한 학맥도 등이 전시돼 있다.
남명 조식 선생 기념관 전시실 모습. 전시실에는 선생 생애와 관련된 유물 및 후학을 기록한 학맥도 등이 전시돼 있다.

◇지리산 천왕봉을 사랑한 처사 남명 조식 남명
조식 선생(1501~1572) 고향은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그는 61세이던 1561년 거처를 산청 덕산(지금의 시천ㆍ삼장면 일원)으로 옮겨 덕천강변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력했다.

노년에 접어든 선생이 고향이 아닌 산청을 찾은 것은 지리산을 무척 흠모한 탓이다.
선생은 자신이 쓴 지리산 견문록 `유두류록`에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을 다섯 방향으로 열한 번이나 갔었다"고 자술하고 있다. 그의 지리산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산천재`는 산청지역 내에서도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손꼽힌다.
남명 조식 선생의 천왕봉 사랑은 각별했는데 그 마음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 천왕봉을 닮고 싶다. -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中`는 그의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선생은 `산천재`를 지은 뒤 앞마당에 손수 매화나무를 심고 애정을 쏟아 돌봤다. 훗날 `남명매`로 불린 이 매화나무는 45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봄 천왕봉을 향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남명 선생이 손수 심은 나이 많은 매화나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적지 않은 이들이 매년 3월이면 이곳을 찾는다.

지금은 계절에 따라 이파리를 모두 떨군 채 `산천재` 앞마당을 지키고 있지만 매년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 봄 꽃을 피워내는 대견한 고매(古梅)다.

`산천재`를 둘러보면 매화나무 앞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며 한 수 시를 읊고 있는 선생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남명 조식 선생 초상화.
남명 조식 선생 초상화.

◇백성을 위한 실천중시 사상, 후학들의 의병활동으로 이어져

`산천재`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선생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남명기념관`을 볼 수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선생 생애와 관련된 유물, 후학을 기록한 학맥도 등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전시실을 만나게 된다.

남명은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죄악`이라 가르쳤다. 그의 실천중시 사상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전제돼 있다.

이러한 탓에 그의 문하에서 공부한 후학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앞다퉈 의병활동에 나섰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와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장군을 비롯해 이노, 전치원 등을 비롯해 50여 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나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결국 경의를 바탕으로 백성을 위해 실천에 앞장서는 남명 선생 가르침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 것이다.

선생 타계 후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고자 세운 덕천서원 전경.
선생 타계 후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고자 세운 덕천서원 전경.

◇연수ㆍ세미나 최적지로 자리매김한 한국선비문화연수원

`산천재` 바로 옆에는 남명 선생 선비정신과 실천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건립한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하 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산청군이 사업비 182억 원으로 시천면 사리 2만 4천600㎡ 터에 연구ㆍ연수동을 비롯해 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연수ㆍ숙박동, 전통체험시설 등 모두 11개 동을 건립했다. 

연구원의 연수ㆍ세미나 참여 인원은 최근 3년간 가파르게 늘어나며 연수ㆍ세미나 최적지로 부상하고 있다.

연구원의 연간 연수 참가 인원은 개원 첫해인 지난 2016년 5천630명에 이어 2017년 1만 3천989명, 2018년 1만 8천500명으로 늘고 있다.

여기에 매년 가을 열리는 `남명선비문화축제` 기간에는 3천여 명이 넘는 관광객과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연구원을 찾아 `선비의 고장` 산청의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연구원은 남명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구원을 찾는 연수생을 대상으로 청렴ㆍ인성ㆍ예절을 주제로 한 `선비문화체험연수` 프로그램을 운영,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남명 선생 민본주의와 실천사상을 시대정신으로 확대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구원이 이처럼 연수ㆍ세미나 최적지로 각광 받는 이유는 우수한 시설 인프라와 지역이 지닌 자연환경 덕분이다.

남명 선생이 거창 포연대에서 목욕한 후 지은 시를 새긴 욕천 시비 모습.
남명 선생이 거창 포연대에서 목욕한 후 지은 시를 새긴 욕천 시비 모습.

연구원에는 크고 작은 규모의 강의실 8개와 300여 명이 한 번에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과 식당, 체육시설이 갖춰져 있어 학생들은 물론 공무원과 기업 등 단체 연수팀이 잇따르고 있다.

남명 선생이 `무릉도원` 같다고 극찬한 덕천강과 지척에 있는 지리산 천왕봉, 대원사 계곡 등 자연환경이 우수한 탓에 `힐링체험`에도 최적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구원은 올해 국ㆍ도ㆍ군의 지원에 힘입어 모두 11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공직자, 학생, 기관단체 등 다양한 대상에게 남명 사상과 정신, 넓게는 경남의 유교문화 계승 발전에 앞장설 계획이다.

올해 연구원이 운영하는 특화 연수프로그램은 △선비문화체험연수 △지역 내 학교로 찾아가는 선비문화교실 △지리산 천왕봉ㆍ대원사 계곡을 활용한 남명 힐링캠프 등이 있다.

또 전국 최대 규모의 한방항노화 테마파크인 동의보감촌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마을 1호` 남사예담촌, 문익점 선생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목면시배유지 등 산청의 대표 관광자원을 연계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연구원은 남명 선생 등 옛 선비문화 연구활동은 물론 선비들 사상과 행동을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이끌 경남지역 공무원, 학생 등의 정신적 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선생의 제자인 성리학자 최영경이 유생들 휴식처로 세운 세심정 모습.
선생의 제자인 성리학자 최영경이 유생들 휴식처로 세운 세심정 모습.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 그리고 세심정(洗心亭)

산청군 시천면 일대에서는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비롯해 남명 선생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산천재`를 벗어나 중산리 방향으로 5분 정도 차로 이동하면 선생 타계 후 4년이 지난 해인 1576년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고자 세운 `덕천서원`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키 높은 은행나무. 둘레를 재려면 장정 서넛은 있어야 할 정도로 장골이다.

`덕천서원`은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몇 차례 소실됐다가 다시 제모습을 찾는 풍파를 겪었지만 서원 앞을 지키는 은행나무는 몇백 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모습이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고즈넉한 서원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원 양 옆으로 심어진 배롱나무는 더운 여름이면 분홍빛 꽃을 피워 심심한 서원의 풍경에 활기를 더한다. 지금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수줍은 모습이다.

남명 선생의 실천 중시 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건립한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전경.
남명 선생의 실천 중시 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건립한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전경.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덕천서원`을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선생 제자들이 선생을 본받고자 덕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었다는 `세심정`을 만난다.

`세심정`은 선생 사후, 제자이자 저명한 성리학자였던 최영경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휴식처로 세운 정자다.
비록 강은 치수사업 등의 탓에 옛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지만 강을 바라보며 지어진 정자의 정취는 옛 그대로다.

`세심정` 옆에는 남명 선생이 거창 포연대에서 목욕한 후 지었다는 `욕천`(浴川)이라는 시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온몸에 쌓인 사십 년 간의 허물.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배를 갈라 죽음에 이를지언정 자신의 허물과 티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의 고결한 선비정신이 한편의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지리산의 굳건하고 의연한 모습을 닮기를 바란 선비, 누구보다 앞장서 나라의 위기와 국민 안녕을 지키라 가르친 스승, 흐르는 물에 자신의 한 점 티끌까지 씻어내 청렴함을 지키려한 구도자.

남명 조식 선생 발자취를 따라 걸어본 길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더 천왕봉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선생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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