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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와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와 악의 평범성
  • 이광수
  • 승인 2019.11.24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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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h Arendt)가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에서 부제로 추기한 유명한 말이다. 버낼리티(banality)란 단어를 영영사전에서 찾아보면 새롭거나 흥미롭거나 오리지널한 그 무엇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이고 흥미가 없으며 특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너무나 흔해 쉽게 예측 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독일 하노버시에서 독일 상류계급에 동화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 후 철학과 신학에 매료돼 마르부르크 대학에 진학해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크 지도하에 공부하면서 그와 연인 사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이데크와 사상적 지향점이 달랐던 그녀는 그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 교수인 카를 야스퍼스 지도하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개념`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히틀러가 통치하는 나치 정권하의 암울한 상황에서 시온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다 체포돼 수용소 생활 중 탈출해 프랑스로 갔다.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미국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소식을 듣고 그녀의 주 저서이자 사상적 기반인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표해 본격적으로 정치사상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인간의 조건` 출간 후 시카고 대학교수가 돼 자신의 정치사상을 정리한 `혁명론`과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세계 지성계에 큰 반향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특히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의 적`으로 낙인돼 2000년까지 이스라엘에서는 그녀의 저서가 단 한 권도 출간된 적이 없었다.

 한나 아렌트는 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후 펴낸 저서에서 그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정의했을까. 그녀는 아이히만의 진술과 관련된 수많은 기록을 철저히 조사해 6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끔찍한 범죄 원인을 찾고자 했다. 그녀가 찾아낸 해답은 많은 사람들(특히 유대인)의 감정을 불편하게 했으며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군 실무 관리로서 감정 없이 살인 기계로 변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가 유대인 학살 정책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양심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에 충격을 받았으며 최소한 독일계 유대인만큼은 살리고자 호소했으며 친분 있는 유대인을 지키기 위해 손을 썼다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 이런 그가 결국 양심의 죄의식을 버리고 범죄에 동참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 모든 과정에서 유대인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볼 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이는 아이히만의 진술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14년간 숨어 살다가 이스라엘 요원들에게 발각됐을 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됐다. `왜 유대인을 죽였느냐`는 질문에 `1년 반 전 지인으로부터 독일 청년들 중 일부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는 제게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죄책감에 대한 대화 후 저는 더 이상 잠적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대답했다. 학살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죄의식조차 느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 분위기와 전쟁이 끝나고 14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접했다는 아이히만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렌트는 그의 진술을 확인하면서 홀로코스트는 히틀러 휘하 아이히만을 비롯한 학살주모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를 방관하고 방조한 모든 사람들(특히 독일인)의 책임이 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유대인 학살의 근원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정의했다.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날 무렵 부하들에게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며 5백만 유대인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유대인 대학살 같은 범죄행위가 그 후 없었던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국에서 자행된 수십 수백만 명의 인간 살육 만행은 무수히 발생했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유대인 대학살에서 보여준 것처럼 범죄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인간의 이중성과 본성은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범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의 전형인가, 아니면 페르소나 인간의 화신인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인류 구원자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면서 그 이웃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했다. 그러나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세상은 오늘도 세계 도처에서 양심의 탈을 쓴 채 증오의 씨앗을 뿌리고 있으며, 선한 사마리아인이 사랑받는 세상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사형장의 교수대에 서서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실연한 아이히만의 외침이 메아리가 돼 들려오는 것 같다. 과연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이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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