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3:57 (금)
다산의 흠흠신서와 사법 정의의 추락
다산의 흠흠신서와 사법 정의의 추락
  • 이광수
  • 승인 2019.10.28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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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흠흠신서(欽欽新書)는 다산 정약용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2서1표) 중 학계나 세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조선 정조 시대의 판례연구서이다. 신유박해로 18년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편찬한 조선 최초의 전무후무한 법률서임에도 아직까지 학계의 연구 성과가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산의 명저인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국민필독서이다. 그러나 흠흠신서는 법률사학자를 제외하고는 책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최근 여유당전서 전집 발간 소식을 듣고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섭렵하다가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심재우. 산처럼)`라는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사 읽었다. 법학자 다산의 삶과 흠흠신서의 내용을 축약해서 해설한 책이다.

 흠흠신서는 당초 책 제목을 명청록(明淸錄)이라 정했으나 서경(書經)의 우서(虞書) 편에서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의 흠재흠재(欽哉欽哉) 구절을 인용해서 흠흠신서로 고쳤다고 한다. 책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경사요의편 3권, 비상전초편 5권, 의율차례편 4권, 상형추의편 15권, 전발무사편 5권 등 총 5편 30권으로 편제돼 있다. 이 중 정조 때 발생한 살인사건을 수록한 `상형추의(祥刑追議)`가 15권으로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144건의 살인사건이 22개 항목으로 상세하게 분류돼 있다. 그중에는 특이하게도 살인자임에도 정조임금이 열전에 올리도록 한 사건이 있는데 김은애와 신여척의 살인사건이다. 그 당시 유교의 도덕률(여성의 정조와 형제애)을 지키려다 범한 살인사건이어서 정조가 일반 백성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형을 면제해주고 열전까지 만들게 한 것으로 보인다.

 흠흠(欽欽)은 두려워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형사(刑事)를 다루고 판결함에 신중을 기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백성이 없게 경계하는 말이다. 지금도 오래전 누명을 쓴 살인사건의 판결이 뒤집혀지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법은 문자 그대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흔히 약자나 서민들이 푸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현실적으로 유효하다. 그만큼 사건을 다루는 수사기법적용의 세심한 고려와 재판 시 법리해석의 공정성과 합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과거급제를 위해 사서육경과 역사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법률서 공부는 외면했다. 생사여탈권을 쥔 고을 수령인 현감이나 관찰사가 법률 지식 쌓기를 하지 않아 형리를 그르친 경우가 많은 것을 본 다산은 이의 개선을 목적으로 흠흠신서를 편찬한 것이다. 대명률, 속대전 같은 기본법률서와 세원록, 부원록 같은 법의학 서적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법률 문외한을 현감(종6품)으로 파견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흠흠신서는 중국과 조선에서 발생한 여러 살인사건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정리해 놓고 사건처리의 문제점과 법률용어해설, 자신의 비평까지 가미한 사건판례연구서이자 형법학, 수사학 지침서이다.

 현재 재판에 계류 중인 시국 관련 사건의 경우 재판 결과에 따라 개인은 물론 소속정치집단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지만 법원판결을 놓고 아전인수 격으로 왈가왈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내로남불에 이골이 난 정치인들은 면책특권을 악용해 자신들이 제정한 법을 스스로 위반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극단적인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민의의 전당이라는 의회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여야가 네 탓 공방으로 날밤을 지새우고 있다. 정치가 갈 짓자 걸음을 하니 공권력이 무력해지고, 정사 유착에 따른 사법부의 불신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 불능상태로 추락했다. 때를 만난 정치 기생 세력들은 페르소나(가면)로 위장한 채 프로파간다(선전선동)로 여론을 호도하며 국론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정권탄생의 공신임을 자처하는 압력단체가 법 위에 군림하며 뗏법 투쟁으로 국정 향배를 좌지우지한다. 약자 코스프레로 무장한 아나키스트들(무정부주의자들)의 일탈 행동이 도처에서 기세를 떨치는 가운데 SNS의 카더라 식 뉴스가 난무하고 있다. 공공의 적으로 내몰린 갑질이 전도돼 공직사회마저 특별권력관계가 무너지고 상사가 부하직원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막스베버는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중앙부처 어느 장관은 공직자의 정치 중립의무를 망각한 채 `영혼을 파는 관료` 행세를 한다고 모 신문은 꼬집었다. 자기 능력과 분수를 망각한 사회주의식 평등은 정의로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이 아니다. 몰상식이 상식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법 정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 중략… 내가 목민심서를 편찬하고 나서 인명에 대해서도 마땅히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이 책을 별도로 편찬했다.` 다산 정약용이 흠흠신서를 편찬하면서 쓴 서문의 말미다. 목민 정신과 애민 사상에 깊이 천착한 다산의 흠흠신서 발간 취지가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추락한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는 지름길이 과연 무엇인지 흠흠신서에서 그 해법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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