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18:47 (화)
`82년생 김지영`과 어떤 낙인
`82년생 김지영`과 어떤 낙인
  • 어태희 기자
  • 승인 2019.10.22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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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부 기자 어 태 희
지방자치부 기자 어 태 희

 "나 그 영화 보면 눈물 날 것 같아."

 친구들과 근황에 대해 주고받던 중 두 아이를 둔 친구 A가 오늘(23일) 개봉하는 영화인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말했다. A는 주말에 시간을 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단다. 즐겁게 대화를 나눈 뒤 친구 A는 가고 B만이 남았다. B가 돌연 인상을 쓰며 나에게 물었다.

 "걔 페미(Feminist의 줄임말)야?"

 성차별과 여성 억압을 타파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일반적으로 성차별을 지향하는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 물음에 쉬이 답하지 못했다. 친구가 묻는 `페미`가 일반적인 의미의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수 세기 동안 충돌과 갈등을 반복해왔다. 계층, 종교, 인종, 정치 등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심하면 폭동과 전쟁에까지 이르며 거센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21세기, 인류의 갖가지 갈등이 조금씩 종식되고 있는 상황에 또 하나 부상한 것이 성 갈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혐과 남혐`이라는 이름으로 두 성별이 극렬하게(특히 온라인상에서) 다투고 있다.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점차 변질되고 과장되기 시작한 성 갈등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제 `페미`는 일반적인 의미의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급진적 여성주의자)냐는 물음과 같다. 이미 젊은 세대에게는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의 경계가 모호하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고착화된 인식이 사상의 변질을 야기했다.

 필자가 존경하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은 20세기에 폭력과 폭언, 차별에 핍박받던 여성들을 도왔다. 동지들과 `여권신장`을 외쳤다. 이외의 성별을 배척하지 않았고 평등을 바랬다. "평등 주장하면 남자한테 백 좀 들어달라고 하지 마라"고 여학생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 사람이다. 이런 페미니스트들까지도 `래디컬 페미니스트`(혹은 `페미`)로 폄하되기 시작했다. `남혐과 여혐`의 산물이다.

 어떤 사상이든 급진으로 가서는 얻을 게 없다. 타협은 힘들고 배척과 무조건적인 혐오만이 남는다.

 예매율 50%를 육박하고 있는 영화 `82년생 김지영`도 이 성 갈등의 뜨거운 감자다. `82년생 김지영`은 제목 그대로 82년생인 여성 김지영의 시각에서 여성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그려낸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은 2018년 밀리언셀러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16개국으로 수출됐고 특히 최근 일본과 중국에서도 열풍을 끌고 있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소설이 주로 다루고 있는 주제에 공감대를 얻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82년생 김지영`을 보지 않아 책 소개와 리뷰를 참고했다는 것을 밝힌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주인공과 상황이 흥행에 한몫했다. 그러나 소설이 발간되고 국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 성 갈등의 한가운데에 놓이면서 논란이 격화됐다.

 페미니즘을 넘어선 국내 래디컬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이 소설은 사상의 바이블이 됐고 남성들은 `모든 남성을 가해자로 일반화한다`며 소설에 반감을 가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82년생 김지영`은 `페미`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일반인에서 연예인에게도 편견과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이다. 많은 소설이 작가의 이데올로기를 담아 탄생하지만 그것이 `반인류적`이지 않는 한 합리적인 비판은 받아도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까지 주홍글씨를 새기지 않는다.

 친구 A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아직 한참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기에 A의 자유로운 사회생활은 힘들다. 몇 년의 시간 동안 공부를 하거나 취직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부럽다`고 얘기하는 평범한 주부다. 아이들에게 눈을 뗄 수 있는 시기는 아직 한참 남았다. 토끼 같은 자식들이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제 생각에 가장 빛날 시기가 어딘지 모르게 아쉬울 땐 우울하기도 하다. 그런 A가 한국 여성의 일반적인 모습(특히나 주부의 역할을 하는)을 담은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공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1점짜리 영화`라도 그 영화를 보는 이들마저 어떤 낙인을 찍지 말자. 작은 타협과 이해가 언제 끝날지 보이지 않는 이 갈등을 조금씩 식혀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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