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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악화와 황현의 매천야록
한일관계 악화와 황현의 매천야록
  • 이광수
  • 승인 2019.09.2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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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우리는 흔히 국가 대사가 걸린 일에 문제가 생기면 역사의식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고 성토한다. 과연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그 시대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나 하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있는 역사도 왜곡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꿰맞추려는 역사교육의 부재 상태에서 과연 이념 고수만이 지고지순이고 국가이익은 차선책인지 각자 판단에 맡긴다.

 최근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기업배상 판결로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다. 1965년 맺은 한일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 차이가 존재하는 가운데 대법원이 `일제 강제 징용자 배상 판결`을 하자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한 무역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질세라 우리 정부도 일본과 똑같은 보복 조치를 취하고 WTO에 제소했다. 이로써 해방 이후 한일관계는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 정부와 일본 정부가 맺은 협정을 새 정부가 파기함으로써 한일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느낌이 든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군국주의 부활과 함께 전쟁 가능 국가로 헌법을 바꾸려는 아베 정부와 극우단체의 혐한정서 팽배로 기대난망이다. 한일관계의 악화는 동북아 한미일 삼각 외교 군사 안보체계의 균열을 의미한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지만 한미 관계보다 미일 관계를 우선시하는 미국 트럼프행정부는 불개입 원칙을 고수해 오고 있다.

 그러나 미ㆍ중ㆍ러ㆍ일 등 강대국의 틈새에서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자존심만 내세울 수 없는 지정학적 한계가 존재한다. 정국 주도에 유리한 반일정서를 배경 삼아 대일 강경외교정책을 고수하고 있지만, 우리의 국가안보 상황은 주변강 대국들의 군사 패권 향배에 따라 생존의 묘수를 찾아야 한다. 해방 후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극일이 아닌 반일에 목을 매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이 와중에 2019년 일본 국방백서에는 독도에 자국의 항공자위대가 발진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어 양국 간의 군사적 긴장과 충돌까지 우려된다. 애국도 애족도 우리의 생존 문제와 직결될 때는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중국 덩샤오핑이 취용한 무경팔서 육도(무도)의 `도광양회`를 원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주장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강한 상대가 수용 불가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13억의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자신들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구사하는 강온양동의 외교 전략을 우리도 한 수 배워야 한다. 다만 지난 역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역사기록으로 잘 보존해 남기고, 망국의 비극을 낳게 한 위정자들의 국민 배신과 무능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쓴 황현(黃玹) 선생은 철종 6년(1855년) 전남 광양현 서석촌에서 황시묵의 아들로 태어났다. 매천(梅泉)은 그의 호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11세 때 한시를 지어 신동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영민했다. 17세에 결혼한 후 24세 때 상경해 강위, 이건창, 김택영과 교류했다. 초시 생원시에 장원급제했지만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혼탁한 정치에 투신하는 것을 끄려 고향에 돌아와 서제에 전적을 높이 쌓아놓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는 유학자였지만 경륜 지사로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날선 비판을 가했다. 그가 쓴 매천야록을 읽어보면 서양문물의 유입을 반대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가 아닌 서구문물의 점차적 유입으로 개화하는 것이 조선의 앞날을 위해 유익함을 강조했다. 언사소(言事疎)를 올릴 만큼 갑오개혁을 찬성했다. 그는 존왕양이(尊王攘夷)나 귀왕천백(貴王賤伯) 같은 종래유학자들의 공통된 관념을 부정해 대원군과 대립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한일합방이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년 9월 10일 유시(遺詩)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복용해 자결했다. 가슴에 품은 회한을 풀지 못한 채 망국의 원혼이 된 매천 선생의 절명시는 통절함의 극치이다.

 1. 난리를 겪고 보니 백두 년이 됐구나 /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에 비추도다.

 2.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 성이 옮겨지니 / 구중궁궐 침침한데 시각이 더디구나 /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3.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는데 / 무궁화 삼천리강산은 이미 침륜 됐구나 / 가을 등잔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일을 생각하니 /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인가.

 4.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만 공도 없었으니 / 단지 인(仁 )을 이룰 뿐이니,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 / 겨우 윤곡을 따른 데 그칠 뿐이요 / 그 당시 진동의 행동을 밟지 못함이 부끄럽도다.

 매천 황현 선생은 나라를 망하게 한 위정자의 잘잘 못을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직필해 가려냄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죽음으로 일깨워 준 실사구시의 우국 경륜 지사였다. 위정척사 고수와 실사구시의 배척으로 패망한 조선의 통한을 절명 시로 남긴 매천 선생의 역사의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현재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관계를 매천의 실리적 우국 지정과 국익 우선의 관점에서 크로스오버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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