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5:04 (금)
한국 정치 시계는 돌지 않는다
한국 정치 시계는 돌지 않는다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9.09.26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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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류 한 열
편집국장 류 한 열

지금 우리 정치가 만들어내는

대립은 오직 자기편 감싸기다.

우리는 정치가 뒷걸음치는 거대한

현장을 매일 보고 있다. 검찰의

조국 장관 수사가 마무리돼

자리 보전이든 자리 퇴출이든

결과가 나와야 멈춰 섰던

우리 정치가 진보할 것 같다.

 진보ㆍ보수정치 대립이 정점에 올라섰다. 조국 찬성과 조국 반대로 편을 갈라선 대치는 보기에도 위태롭다. 조국 장관을 지키려는 여당과 조국을 끌어내리려는 야당에게 양보는 없다. 양 진영에게 반대 논리는 있지만, 타협을 할 수 있는 영역은 `한 평`도 없다. 내년 총선과 집권 여당의 장기집권 플랜까지 섞여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말은 밑도 끝도 없다. 국민을 단순 무식꾼으로 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거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여야의 대치에 맞춰 말깨나 하면서 사회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내놓은 말에도 무조건 한쪽에 힘을 보태려는 의도가 있을 뿐 논리가 없다. 여야가 극명한 대립을 해도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지금은 규칙도 없다. 극단의 편 가르기만 있을 뿐이다. 진보나 보수 한쪽에 속하면 다른 쪽은 무조건 맞서야 하는 대상이 된다. 정치인들이 이런 극단의 대치를 묘하게 만들고 있다.

 `내 편 네 편 그림`은 인간의 욕심에서 그려진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편 가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DNA가 들어있다. 자기편이라고 여기면 심리적으로 편하다. 내 편 네 편이 힘을 쓰는 현실에서는 마녀사냥이 통할 수 있다. 유럽 중세 시대에 `마녀`라고 불린 사람은 국가나 교회가 볼 때는 이단자였다. 이단자란 자기가 믿는 이외의 주장이나 이론을 펼치는 사람이다. 중세 때 자신들과 조금 다른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마녀`라 부르고 불태웠다. 이런 끔찍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권력자나 기득권자에게 마녀는 몹쓸 인간이거나 기존 질서를 흔드는 네 편일 뿐이다. 마녀는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찮은 도전에 맹목적인 잣대를 들이대 생명을 빼앗는 짓을 서슴없이 했다. 이런 마녀사냥이 행태만 바뀌어 요즘도 횡행하고 있어 문제다. 인간의 근본 지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

 어려운 시대에 역사책을 들추면 쓸만한 교훈을 잡을 수 있다. 조선 시대 파벌싸움에서 숱한 사화(士禍)가 나왔다. 특히 1589년에 일어난 기축사화에서는 서인 세력에 의해 동인 세력 1천여 명이 옥에서 죽었다. 조선 500년 동안 가장 끔찍한 사건이 내 편 네 편 가르기에서 나왔다. 국가의 존립을 두고도 편이 다르면 생각까지 달리하는 어리석은 짓이 행해졌다. 난세에 역사가 답을 준다. 서인과 동인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정세와 상황을 파악하는데도 엇갈렸다. 일본의 정세를 똑같이 보고 왔는데 서로 다른 보고를 하는 것은 나라보다 자기편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내 편 네 편 내세우다 나라도 팔아먹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 첫 무대에서 "국민의 열망인 법무부 혁신과 검찰 개혁의 무거운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야당 의원은 조 장관에게 질문할 때 `장관`이라는 호칭을 빼고 "법무부를 대표해 나오라"고 말했다. 야당이 인정 못 하는 법무부 장관이 검찰 개혁을 부르짖었다. 국회가 정치를 소재로 쇼하는 무대가 됐다. 조 장관이 개혁을 말하는데 야당 의원은 "사퇴할 생각이 없나"고 물었다. 정치 행위를 하는 현장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일 수 있다는 증거를 국회 대정부질문 현장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야당의 거친 질문에도 꼿꼿하게 대처하는 조국 장관의 멘탈은 대단하다. 조국 장관은 내 편 네 편 싸움의 주인공다운 캐릭터를 소유하고 있다. 국민 대다수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었던 여러 행위를 두고 "잘 모른다"고 했던 답변이 자신의 믿음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편 네 편 싸움이 벌어지는 치열한 현장에서는 대표성을 띤 주인공은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자신을 믿어주는 한쪽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의는 없고 진영만 있다.

 역사가 E.H.카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대명제를 던졌다. 역사가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진보하는지 몰라도 권력욕을 뿜어내는 폭군이나 독재자가 나와 큰길을 따라 인류 역사 시계를 뒤로 돌렸다. 폭정과 전제정치가 난무할 때도 정치는 나아졌다고 강변하면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한다. 조국 사태로 현재 우리 정치가 만드는 내 편 네 편 신드롬을 보면서 정치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을 수가 없다. 정치가 존재하는 한 내 편 네 편 가르기는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정치가 만들어내는 대립은 오직 자기편 감싸기다. 우리는 역사가 뒷걸음치는 거대한 현장을 매일 보고 있다. 검찰의 조국 장관 수사가 마무리돼 자리보전이든 자리 퇴출이든 결과가 나와야 멈춰 섰던 우리 정치가 진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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