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어디에 있니?
에릭 어디에 있니?
  • 김성곤
  • 승인 2019.09.2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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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심리학 박사/독서치료전문가 김 성 곤
교육심리학 박사/독서치료전문가 김 성 곤

 지난주에 이어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책은 좋은 씨앗에서 펴내고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지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이다. 책의 메모를 살펴보니 2017년 4월에 이 책을 읽었고 글을 쓰면서 다시 읽어 보았는데 같은 책 다른 느낌이다. 신기한 것은 같은 책 같은 영화라도 읽을 때마다 주는 감동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 가을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책장에 꽂아 뒀던 책들을 다시 읽으며 다른 감동을 경험하시는 것은 어떨까?

 "내 마음에 가득한 후회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산책을 하러 가면서 어린 에릭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에릭과 함께 있어 주기 보다 일을 우선시했던 것에 대한 후회, 에릭에게 편지 쓰는 것을 게을리했던 것에 대한 후회, 평정심을 잃고 화를 냈던 것에 대한 후회. 모두 다 후회가 된다. 그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순간들이 후회로 되살아난다. 내가 에릭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나는 그렇게 성숙하지 못했다. 에릭이 슬픔에 빠진 것을 보았으면서도 위로하지 못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후회가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는 에릭의 존재를 너무 당연시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서로의 존재를 너무 당연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산란해지며, 자신이 추구하는 대상에 몰두하느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며, 염려와 슬픔 때문에 우리의 집중력은 흐려진다. 친숙함이 주는 아름다움들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있다.

 "에릭 어디에 있니?"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자식이 부모를 앞서 먼저 죽는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었다면 이별이 좀 더 쉬웠을까? 우리는 에릭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에릭은 가고 없다. 지금 여기에 그는 없다. 이제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그를 안을 수도 없고, 그가 전하는 장래의 계획을 들을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나의 슬픔이다.

 한사람 그 누구와도 대치할 수 없는 그 한 사람이 가버렸다. 세상은 더욱 빈 곳이 되었다. 내 아들이 가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느끼는 아픔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나 또한 글을 쓰면서 자식의 죽음을 경험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에게 어떤 위로의 글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문화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는 강해야 하며 슬픈 일을 당해도 눈물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야 한다"고.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어느 늦은 밤 꺼이꺼이 아파트 외진 구석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알고 보니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울음이란다. 평소에 말이 없고 과묵하기가 대부분인 아버지가 그 아들을 그토록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자! 그 대상이 누구든 아들이든, 딸이든 아내이든 남편이든, 부모이든, 연인이든 표현하지 않은 것을 상대가 알아듣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처럼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할지, 보는 이 없는 가운데 소박하게 혼자 죽음을 맞이할지 그 누구도 나 자신도 모른다. 그렇다면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오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어떨까?

 에릭의 아버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후 이렇게 고백했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세상을 보리라. 그러면 이전에 마른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에릭 어디에 있니?"라고 절규하기 전 내 곁에 있는 또 다른 이름의 에릭을 찾아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행복해지자!



 "에릭 어디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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