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17:33 (목)
우리 조국의 원죄설
우리 조국의 원죄설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9.09.05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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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류 한 열
편집국장 류 한 열

광복의 빛이 희미할 때
많은 지식인은 훼절하고
일제의 편에 섰다. 그들의
원죄는 아직도 유효하다.
"아 조국은 무사히 건넜을까?"
원죄를 씻는 길은 그 길에서
돌아서는 방법밖에 없다.

 중고교 시절 조국(祖國)이라는 단어는 가슴을 뛰게 했다. 국어 시간에 나라 잃은 설움을 기술한 본문이나 조국을 등진 선각자의 마음을 담은 시를 대할 때 가슴이 멍했다. 나라가 없던 시대에 정신이 깨어있던 조상들에게 `조국`은 어머니의 가슴보다 더 뜨거운 존재였다.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인 조국을 침탈한 일제에 맞선 우리 조상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되찾아야 하는 생명의 젖줄이 조국이었다. 중고교 학생 때 "아 조국이여"라고 되뇌면 가슴이 뭉클했다. 교육의 힘이었겠지만 핏속에 흐르던 민족애의 DNA도 작용하였으리라. 슬픈 조국을 머리에 진 민족의 한이 조상들에게 서려 있었다. 아직까지 우리 현실에서는 일제가 뿌린 슬픈 얘기가 이어지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가 여전히 애를 태우고 소녀상의 눈물은 우리 가슴에 생생하게 숨 쉬고 있다.

 고교 시절 김동환의 `국경의 밤`은 우리 민족의 고통스러운 삶과 나라를 잃고 떠도는 유랑민의 삶을 애절하게 풀어내 어린 학생들에게 한을 안겼다.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질곡사를 만들어 낸 최초의 장편 서사시로 문학사에 이름을 올렸다. `아아,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강안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경이 왔다 갔다 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던 `국경의 밤`에서 많은 고교생은 순이 남편 병남이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김동한은 초기에 민족주의 시를 썼으나 1930년대 들어서 변절했다. 김동환은 행방 후 친일 문사로 지목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재판을 받아야 했다. 한밤에 국경의 밤을 건너며 나라 잃은 한을 노래했던 시인은 나라를 뺏은 일제의 편으로 붓끝이 돌아갔다.

 현실과 이상은 함께 실존하면서 이율배반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민족의 수난사를 노래하던 문인이 되레 민족의 수난을 던져준 원수를 찬양하는 굴레를 쓰는 참담한 상황은 너무나 많았다.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일제의 만행을 미화하는 데 앞장섰다. 조국을 잃은 모진 상황에서 자기 한 사람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준 사례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지식인들은 해방의 아침을 맞이하면서 "아 조국이여"라고 개탄했을 것이다. 어떤 친일파 문인은 "이렇게 광복이 빨리 올 줄 몰랐다"고 했다는데 현실의 이기지 못하고 이상을 버렸으니 오죽 마음이 아팠을까.

 현재 우리나라는 조국 지키기와 조국 무너뜨리기에 혈안이 돼 있다. 여기서 조국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말한다. 조국 한 사람이 국민을 대략 양분해 엄청난 소모전을 이끌고 있다. 잃었던 조국(祖國)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선각자의 고귀한 희생을 바탕에 두고 조국(曺國)을 세우거나 누르기 위한 나름의 희생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이 든다. 조국 후보자를 두고 거대한 두 진영이 펼치는 싸움은 옳고 그름의 잣대는 없고 내 편과 네 편이 있을 뿐이다. 한쪽이 공격하고 한쪽이 방어하는 모양새를 보면 초등생도 웃을 수밖에 없는 논리를 갖다 붙인다. 조국 후보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변명은 그 당시의 잣대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식의 강변이다. 상황 논리로 풀면 모든 문제를 바로 보거나 거꾸로 보거나 별반 차이가 없다. 조국 문제는 이미 원죄설을 잉태하고 있다. 아무리 상황 논리로 몰고 가고 여권의 말깨나 하는 사람들이 조국을 감싸도 원죄의 굴레를 벗을 수 없다.

 원죄는 이것이다. 반칙과 특권을 동원해 내 가족을 우선했다는 것이다. 사모펀드나 웅동학원과 관련한 불법성 여부는 다음의 문제다. 남들은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나는 특권을 동원해 앞줄에 선다면 뒷줄에 선 사람은 분통을 터뜨리는 건 당연하다. 어떤 누구도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희망을 꺾을 권한은 없다. 반칙과 특권을 휘두르면 많은 사람이 희생된다. 법치를 말하기 곤란한 공간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더 열을 받는다. 기독교적 원죄는 신 앞에 진실한 사죄가 있어야 씻어진다. 사죄 뒤에는 거기에 걸맞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광복의 빛이 희미할 때 많은 지식인은 훼절하고 일제의 편에 섰다. 그들의 원죄는 아직도 유효하다. "아 조국은 무사히 건넜을까?" 원죄를 씻는 길은 그 길에서 돌아서는 방법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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