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5:00 (수)
호박죽 이야기
호박죽 이야기
  • 은 종
  • 승인 2019.09.04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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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종 시인, 독서치료 프로그램 개발 독서지도, 심리 상담사
은 종 시인, 독서치료 프로그램 개발 독서지도, 심리 상담사

 폭양이 작열하는 언덕에 제 이파리를 감싸 안고 골 깊은 몸통을 불려 온 호박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호박을 들여다보면 굴곡진 삶을 살아 온 우리네 어머니 모습 같기도 하다. 포도처럼 탱글탱글하지도, 사과처럼 싱싱한 자태도 아닌 그저 넉넉한 품 하나만으로 새끼 씨앗들을 키우느라 노심초사, 뙤약볕도 장마도 견뎌온 모정(母情)이 엿보인다.

 어머니는 호박을 씻어 조각조각 잘라 봉투에 넣어주시며 기호에 따라 끓여 먹어보라 하신다. 고향 집에서는 찹쌀과 멥쌀가루로 반죽한 새알심 넣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나는 새알심을 넣으면 호박 특유의 맛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넣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호박죽의 효능은 예로부터 부기를 빼는 데 탁월하다 해 산모들이 산후조리 음식으로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혈압 예방, 폐암 예방, 눈 건강, 항암 효과 등 체내의 유해물질을 제거하고 인체의 면역기능을 높여주기도 한다.

 호박죽을 손수 끓여보는 나로서는 어떤 순서로 무엇을 첨가해서 해야 할지 몰라 인터넷 검색에 들어간다. 순서대로 읽어도 나만의 독특한 방식대로 한 번 끓여보기로 했다. 불려둔 세 종류의 콩, 그리고 찹쌀은 따로 삶아두고 호박을 잘게 썰어 분쇄기에 간다. 그다음 냄비에 삶은 콩과 찹쌀가루, 호박, 소금 약간, 그리고 설탕, 꿀을 넣어 센 불에 올려 둔다. 조금 있으니 노란 즙이 보글보글 끓으며 한가운데 별 모양이 그려진다. 그 별을 무너뜨리기가 아까워 급하게 인증 숏을 찍은 후 젓기를 시작했다. 밑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손과 눈과 입이 함께 작업을 하는데 그야말로 오감이 총동원하는 호박죽 끓이기다. 간을 보니 너무 싱거워 꿀을 한 숟갈 첨가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저어주기다. 아무리 달콤한 맛이라 해도 눌어붙으면 무용지물이 되니, 젓기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장작불을 피워 대형 양은 솥에 작업을 하실 때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죽 알갱이 소리가 참 좋았다. 옆에서 엄마가 하는 모든 행동을 지켜보곤 했다. 어느 정도 죽이 완성되면 긴 주걱 끝으로 퍼 올려 간을 보신다. 군침을 자극하던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미끄러져 다시 솥 안으로 흘러내리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쉬지 않고 저으시던 그 주걱, 비록 그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지금 냄비에 걸쳐져 있는 주걱을 보니 옛 생각이 절로 난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올라 조금 편안하다 싶어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리면 내일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다. 쉼도 잠깐, 호흡 조절하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젓기 작업은 계속돼야 할 것이다. 호박죽을 젓다 보니 그 안에 동글동글 덩굴째 달려있던 호박의 인내심도, 밭이랑에 매달려 있던 콩들의 도약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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