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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의 미각회해 - 아내 바가지에 돼지국밥이 생각난다
김영복의 미각회해 - 아내 바가지에 돼지국밥이 생각난다
  • 김영복
  • 승인 2019.09.02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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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옛날 초가지붕 위에 하얗게 핀 박꽃과 둥근 박이 떠오를라치면 동이에 국을 담고 노끈으로 주렁주렁 이어 매단 바가지를 허리춤에 차고 논둑 길을 가는 아낙의 모습도 함께 연상이 된다. 한여름 논에서 일하다 논둑에 걸터앉아 바가지에 담긴 국에 밥을 말아 먹던 그 시절이 60~70년대인 듯하다.

 필자는 경상도에 와서 하얗게 끓인 돼지국밥을 먹게 됐지만, 충청도 농촌에서 먹던 돼지국밥은 고추장을 풀어 끓인 돼짓국에 밥을 만 것이다.

 옛날 시골에서는 가정에 경조사가 있거나 농번기 때 돼지를 잡아 나눠 갖는 `돼지 돈부리`를 한다. 저녁나절 마을에서 갑자기 "꽤애~액!"하며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처절하게 들려 오면 그날은 돼지 돈부리 하는 날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삼겹살, 오겹살 하며 돼지고기를 구워 먹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때는 먹을 것들이 귀하던 시절이라 돼지고기도 대부분 국으로 끓이거나 찌개로 해 여럿이 나눠 먹었다. 돼지비계가 떠 있는 기름진 고깃국, 지금 그 어떤 돼지고기 요리 집에서 먹는 맛에 비할 수 없는 기가 막힌 맛이었다. 이 시절 기름진 고기 맛을 보지 못했던 분들이 오랜만에 고깃국을 먹으면 이내 설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듯 기억 속에 간직된 `바가지에 담긴 돼지국밥` 참 맛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정경들이 지붕 개량과 플라스틱 바가지가 나오고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이제는 빛바랜 사진첩 마냥 기억 속에만 남고 현실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바가지의 어원은 박에 낮춤 혹은 작음을 의미하는 `아지`, 즉 송아지ㆍ강아지ㆍ망아지에 쓰이는 그 `아지`가 붙어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고유어에 속한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이와 유사한 자연적 그릇이 거의 없었으므로, 우리만의 독자적 전통 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바가지는 봄에 박씨를 뿌렸다가 가을에 박을 따서 만드는데, 반(半)으로 켜고 속을 파낸 다음, 삶아 다시 안팎을 깨끗이 긁어낸 후에 말려서 쓴다. 그 용도도 쌀을 퍼내는 `쌀 바가지`, 장독에 두고 쓰는 `장조랑 바가지`, 물을 퍼내는 `물바가지`, 소의 먹이를 떠내는 `쇠죽 바가지` 등으로 다양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효조(元曉條)`에 바가지를 두드려 악기로 썼다는 기록과 함께 고려 때부터 아악(雅樂)의 8음(音)에 속하는 생황(笙簧)이라는 악기의 재료로 쓰고 있다. 고대 아프리카에서도 부양구(浮揚具)로서 배에 싣고 다녔으며, 제주에서도 해녀들이 부양구로 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깡통을 차다` 못지않게 `바가지를 차다`라는 관용어가 있었다. 거지가 구걸할 때 깡통이 나오기 전에는 바가지를 차고 구걸했던 것 같다. `바가지를 차다` 못지 않게 흔히 쓰는 말이 `바가지를 쓰다`와 `바가지를 긁다`이다. 등목할 때 물바가지를 뒤집어쓰듯 남의 책임을 죄다 뒤집어쓰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더럽고 추잡한 일에 연루됐을 때, `똥바가지를 뒤집어쓰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런데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공감하며 겪는 것이 배우자의 바가지다. 배우자의 잔소리를 바가지라고 하며, 이를 `바가지를 긁는다`라고 한다. `바가지를 긁다`는 병귀(病鬼)를 쫓기 위한 주술적 행위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에는 마을에 `쥐통(콜레라)`이 돌면 무녀(巫女)를 불러 대청마루에서 굿을 벌였는데, 굿판이 벌어지면 소반 위에 바가지를 올려놓고 득득 긁었다. 바가지 긁는 소리에 질린 병귀가 달아나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가지를 긁다`는 바로 이렇게 해서 생겨난 말이다. `바가지`를 숟가락 등으로 긁으면 짜증스러울 정도로 벅벅 소리가 난다. 한마디로 바가지 긁는 소리는 듣기 싫은 소리이다. 그래서 `바가지를 긁다`에 `짜증 나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다`는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바가지로 쌀 없는 뒤주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 남편의 경제적 무능함, 빈곤함을 간접적으로 항의하는 것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남편이 아내를 구박하면 그건 일종의 폭력이지만 그래도 아내가 남편을 구박하면 바가지라고 한다. 아내의 이유 있는 잔소리는 남편에 관한 관심이며, 병귀(病鬼)를 쫓듯 굿판 같은 주술(呪術)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도 남편이 안 바뀌면 아내의 바가지는 남편의 습관만큼이나 땟물에 절여진 윤기로 적응해 간다. 그게 바로 부부의 끈끈한 연륜의 정이 아닌가 한다. 남편들이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에 스스로를 반추(反芻)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얼큰한 돼지국밥의 목 넘김이 훨씬 원활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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