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9:00 (목)
나잇값 하며 살기
나잇값 하며 살기
  • 이광수
  • 승인 2019.08.25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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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최근 뇌 과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시형 박사가 `어른답게 삽시다`(특별한 서재)라는 에세이를 출간했다. 이미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온 이 박사의 에세이들은 하나같이 삶에 지친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들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마음이 병든 수많은 사람을 진료하며 상담하는 가운데 나온 인생 해답들이어서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올해 86세가 됐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느낌이 든다. TV나 라디오를 통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강연을 해온 이 박사는 아직도 쇄도하는 강연으로 몸은 지치지만 마음은 즐겁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과 보람일 것이다. 그는 이번 저작에서도 나이 듦을 서러워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잇값`이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제 분수를 벗어난 행동을 하거나 어른답지 못한 짓을 하면 `나잇값` 좀 하라고 핀잔을 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노쇠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로병사의 자연현상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이다. 그래서 그 순환의 법칙을 인지하고 사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류탄생의 비밀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과학적인 가설에 대한 수많은 연구 결과만 있을 뿐 비밀의 문은 아직도 열리지 않고 있다. 여기에 종교라는 신앙심이 과학적 규명을 대신해 인간의 탄생을 창조주의 산물로 믿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박사는 100세 장수 시대를 맞아 갑자기 위축되고 열등감에 빠져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걱정스럽다고 한다. 우울증은 삶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생기는 정신적 공황 상태다. 이 병이 무서운 것은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고 방치하면 자살로 연결된다는 게 문제다. OECD 34개국 중 노인자살률 1위인 한국으로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울증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감에서 오는 허탈감으로 삶이 공허해지는 것이다. 서구 선진국보다 수십 년 빨리 고령사회(총인구 14% 노인)가 됐으며 앞으로 40년 후면 총인구의 50%가 노인이 되는 노인국가가 된다.(2019년 유엔미래보고서 예측) 그때가 되면 인간의 수명도 120세까지 연장된다고 하니 인생 2모작 시대가 도래하는 셈이다. 이처럼 고령화의 가속화와 수명연장에 따라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되 정신적 육체적으로 젊게 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박사는 최상의 방법으로 죽는 순간까지 은퇴하지 않고 현역으로 뛰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공부하고, 결혼하고, 집 장만하고, 자식 뒤치다꺼리하며 살다 보면 내 인생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다. 탱탱하던 이마엔 어느새 갈퀴진 골이 패이고 검은 머리에는 흰서리가 내린다.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니 후회와 실망감만 가득하다. 떳떳한 남편, 자상한 아내가 되지못했다는 후회와 자식에게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는 자괴감으로 밤잠을 설친다. 일터에서 물러나는 은퇴기가 오면 내 인생은 끝났다는 허무감으로 삶의 의욕을 잃게 한다. 이 사회가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기에 제2의 인생 출발도 마음만 앞섰지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인생의 멘토들은 어떤 일을 할지는 자신의 몫이기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청년실업자가 넘쳐나는 판에 힘에 부치는 막일이나 파트타임 임시직 말고는 노인들을 반겨줄 일터는 드물다. 물론 연금으로 노후생활 준비가 된 일부 계층(30% 정도)은 그런대로 건강 챙기며 취미생활을 하면서 여유로운 여생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노후준비가 안 된 대부분의 50~60세대에겐 그런 생활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리고 일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도 인생 2모작 출발을 머뭇거리게 한다. 전직이 화려할수록 더욱 그렇다. 평생 굳어진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바꾸기가 말처럼 쉽지가 않다. 필부필부로서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온 보릿고개 시절의 노인들에겐 은퇴가 곧 인생의 막장처럼 느껴져 허무감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어쩌랴. 비록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아도 주어진 수명까지 살아야 하니까 무슨 변통을 부려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다이어트하고 규모를 줄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각종 모임이나 사회활동 등 인간관계부터 군살을 빼고, 나이 들어 노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자리 욕심, 권력 욕심도 버려야 한다. 현재 사는 큰집은 부부나 혼자 살기 편한 크기로 규모를 줄여야 한다. 자가용도 자영업이나 사업하는 분 말고는 가능한 처분하고 대중교통 이용을 생활화한다. 이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지향하는 소확행과 뉴트로 현상과도 매치되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멀리해온 독서와 일기 쓰기를 생활화한다. 글솜씨에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기록으로 남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다 보면 자식들에게서 받는 서러움이나 외로움도 사라지고 하루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빨리 간다. 이시형 박사가 말했듯이 `인생을 미련 없이 충실하게 사는 것`이 늙어서도 `나잇값`하고 사는 장밋빛 인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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