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일본 역사관 극복할 애국하는 국민ㆍ역사교육 필요하지요”
[기획/특집]“일본 역사관 극복할 애국하는 국민ㆍ역사교육 필요하지요”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9.08.19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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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사람 송종복 (경남향토사연구회장)
송종복 경남향토사연구회장은 향토사를 바로 세우고 알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송종복 경남향토사연구회장은 향토사를 바로 세우고 알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2014년부터 향토사 연구에 보람
교수직 정년 후 글쓰기에 힘써
바른 역사 알려 사회 계몽 이끌어

중국 항일운동 발자취를 돌아보며
백두산 천지 올라서서 눈물 쏟아
도내 애국지사 발굴 연구에 전념
희수(77세) 들어 종중일에 매진

 송종복 경남향토사연구회장은 요즘 일본의 경제보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역사 학자로서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어떤 나라인가를 곱씹어 볼수록 마음에 이는 회한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입을 빌려서 송 회장의 인생을 추적하면서 그의 역사관과 인생관을 들어본다.

 부산에서 제일 촌마을인 금정산 산기슭에 있는 부산대학 사학과를 다녔다. 한 번은 변소에 가서 이상한 낙서를 보았다. ‘미국한테 믿지말고 소련한테 속지말고 일본사람 돌아오니 조선사람 조심하라’고 벽에 써놓았다. 외우기 좋고 읽기 좋아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금 일본의 작태를 보니 그들이 일러두고 간 모양이다. 1945년에 원자탄을 맛보고 무조건 항복하고 귀국선에 살아갔다. 침공한 나라가 패전하고 돌아가면서 사상자 없이 모조리 살아간 역사는 일본뿐이다. 이태리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가 무사하였던가, 그러나 일본의 ‘히로이트’는 천수를 다했다.

송종복 회장이 지난 2016년에 받은 경상남도 문화상(학술ㆍ교육부문).
송종복 회장이 지난 2016년에 받은 경상남도 문화상(학술ㆍ교육부문).

 조선에서 35년간이나 식민통치하다 본국으로 돌아가니 그 중 아까웠던 것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논밭도 싫고, 돈도 싫지만 조선사람 종(노예)을 놓치는 것이 제일 안타깝다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을 둘러봐도 조선 사람만큼 순진하고, 애절하고, 착하고, 어질고, 예절 갖춘 이런 어진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언젠가는 다시 와서 조선 사람을 노예로 부려 먹겠다는 심보에서 나온 말이었다.

 뿐만 아니다.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 ‘영희야 바둑아 나하고 놀자. 꼭꼭 숨어라 장독 뒤에 숨어라.’ 뜻도 모르고 배웠다. 즉 민족에게 일깨우지 않고 쓸데없이 ‘영희야 바둑아’를 불러 다니며 애국심을 고취시켜주지 못했다. 그리고 왜 ‘꼭꼭 숨어라’ 고 하였을까. 바보 만드는 교육이었음을 알았다. 물론 해방된 조선에 자유를 만끽하고 해방을 즐거워 했다. 그러나 일본은 패전을 악물고 재침을 노렸다. 패전한 그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사쿠라’ ‘히노마루’ ‘후지산’으로 배웠다. 이유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나무, 천황 폐하를 부르는 일장기, 일본 본토를 의미하는 부사산을 아침저녁으로 외우며 교육시켰다. 즉, 내국가(사쿠라, 벚꽃나무), 내황제(히로히토,일장기), 내나라(니혼,부사산)로 애국자를 키우는 꼴이었다. 우리의 교육과 비교해 볼 만하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할 때까지 수감된 만주 여순(旅順) 감옥을 답사했을 당시 김을동 국회의원과 찍은 사진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할 때까지 수감된 만주 여순(旅順) 감옥을 답사했을 당시 김을동 국회의원과 찍은 사진

 일본 요즘 항복문서 달라고 야단

 일본은 패전할 때 미국에 항복문서를 써 주었다. 요즘 와서 항복문서를 돌려 달라는 것이다. 헌법 9조에 ‘일본은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 ‘일본은 군인을 양성하지 않는다.’ ‘일본은 외국을 침략하지 않는다.’고 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 파견한 군인을 군대라 하지 않고 평화유지군(PKO)이라 한다. 앞으로 우리도 애국하는 국민교육과 역사교육이 시급함을 일러둔다.

 뿐만 아니다. 일본은 을사조약(늑약)을 맺고 나서 ‘맺을 때의 마음과 맺고 나서 아니다 라고 하는 마음.’에서 헤이그에 보낸 국왕을 정신병자라고 몰아세워 창경궁에 갇혀 놓고 전국의 병신동물들을 모아 국왕과 같이 놀아라고 궁(宮)을 원(園)으로 고쳐 동물원이라 하였다.

 김해시 진례면 송정리 도강에서 태어나 한림면 안곡리 안덕부락으로 이사했다. 안명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생림중학 재학 중 사라호 태풍으로 진영 한얼중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해주 단지동맹비 앞에 선 필자.
연해주 단지동맹비 앞에 선 필자.

 안곡리 안덕 마을은 호수가 9가구, 주민은 40여명으로 한림면에서 제일 작은 마을이다. 너무나 깊은 산속이어서 앞산과 뒷산 봉우리에 장대 걸쳐 서답(빨래)거는 동네라고 한다. 깊은 산속이라 오전 10시에 햇볕 들고 오후 3시면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 동창 졸업생은 23명이다. 지금은 11명이 살아 있다. 생각하니 4학년 때 아래 위 동내 동무들이 사격장 탄피 주으러 10명(4년 2명, 5년 4명, 6년 4명)이 모여 의논하기로 방과 후 점마뒷산에 탄피 주워 엿 사먹기로 약속하였다. 4학년이라 수업이 먼저 끝나는데 웬일인가! 담임한테 벌 청소를 받았다. 나머지 8명은 기다리다 먼저 탄피를 주으러 갔다. 그날 밤 10시경 온 동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불발탄인 ‘수류탄’인줄 모르고 갖고 놀다가 터진 것이다.

2008년 수훈한 홍조근정훈장.
2008년 수훈한 홍조근정훈장.

 길림서 백두산까지 8시간 차로 달려

 교수는 출퇴근이 일정치 않고 시간표 짜기대로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경남 민방위 강사직(강사협회장)을 맡아 1980년부터 근 20년간 정신강사로 활동하였다. 1987년에는 외국 민방위훈련실태의 전달 강사로 선발되어 관용여권으로 유럽에 시찰가게 되었다. 정부에서 각국 대사관에 연락하여 서유럽 각국에서는 민방위 훈련일자를 잡아 두었다. 그 중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 등을 시찰하였다. 가는 국가마다 주재하는 한국 대사가 나와서 안내하여, 그들의 민방위훈련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현역군보다 민방위 훈련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교육부 학술진흥원의 후원을 받아 중국의 항일운동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방문목적은 학술탐사였다. 그 당시에는 중국에 대사관 영사관이 없고, 단지 대표부만 북경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관광 비자는 낼 수가 없었다. 항공로는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항공을 바꿔 타고 상해로 가서 다시 중국민항으로 옮겨 길림시까지 갔다. 길림시에서 백두산까지 비포장으로 8시간이나 걸렸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니 눈물이 핑 돌았다. 초등학교 때 ‘우리의 맹세를 조례, 종례 때 마다 불렀다. 일, 우리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이,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삼,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이 ‘우리의 맹세’를 얼마나 외웠기에 세뇌되어 나는 태극기를 감추어 갔다.

 이 당시에 백두산 영봉에서 태극기를 보면 북괴들이 총을 쏘았다. 혼자서 조금 떨어져 나가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힘껏 날렸다. 그리고 울었다. 상해에 머물면서 잠깐 홍구(현 노신)공원에 찾았다. 이곳은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의 항일유적지다. 그곳에는 아직 독립투사의 유골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스러웠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곳에 대한제국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하였다. 임시정부를 찾아보니 4층의 민간집이었다. 그곳에는 김구 선생의 회의장과 침대 등이 보였다. 이를 본 삼성회사에서 그 민간집을 구입하여 유적화하고 지금은 관광객이 많이 드나들고 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경남도에서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애국지사를 발굴키 위하여 연구비를 조성하여 사학교수에게 의뢰해 왔다. 마침 향토사를 연구하고 있는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경남도내에서 무수히 많지만은 수부도시인 창원부터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창원의 배중세(裵重世)를 연구하기로 하였다. 우선 후손을 찾았다. 서울에 사는 친손자 배영호를 찾아뵙고 그 다음에 미국에 사는 동생도 만났다. 혹 유적이나 유물 그리고 전해들은 유언을 알아봤다. 다음으로 전국에 고서를 찾았다. 사서가 아닌 ‘기로수필’을 찾고 그 다음 재판한 ‘고등법원의 판결문’(일어 古書로 씀)을 입수하여 항일역사를 찾았다. 그 후 전농(단정) 배중세 애국지사 비석이 창원 상남동 자치센터 옆 용지공원에 세워졌다. 비석을 보고 필자는 대단히 분노했다. 누군가 나의 논문을 표절하고는 ‘00의 이름으로 짓고, 00의 이름으로 쓰다’라고 하였다. 이에 항의하자 비석을 부수고 다시 막대한 시비를 들어 세웠다. 내 일생에 이런 공적이 무너졌나하고는 절망상태까지 갔다. 역사와 진리는 바루어야 한다. 언젠가는 ‘송종복이 연구한 내용이다.’라고 써야한다. 그래야 애국지사의 전농(호)도 떳떳한 위인이 될 것이며, 비석의 이름 앞에 벼슬이나 순절, 순국, 애국 등의 명칭을 써서 참다운 비문이 되어 후세에 길이 빛나야 할 것이다.

 환갑 때 中 재정대학교 교환교수로

 환갑 때는 중국 산동성 성도(省都)인 제남시의 재정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있었다. 그곳에서 동양문화사(한국사)를 강의하였다. 4학년을 4개반으로 편성하여 강의하였는데 강의 신청자는 전공에 관계없이 희망자에 한하였다. 단 조선족은 신청이 안 되는 강좌였다. 종족이 56족이나 되고 보니 세계인종이 다모인 듯하였다. 휴식시간에 중국교수와 환담이 있었다. 문의인즉 나이를 묻고는 중국은 교수정년이 여자는 55세, 남자는 60세인데 한국은 65세라니 교수천국이라 하였다.

 정년을 하고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행사로 독립운동 현장을 찾아서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에 있는 항일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장소는 대련, 하얼빈, 해림, 왕청, 도문, 연길, 화룡, 용정, 훈춘,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등 이었다. 후원은 국가 보훈처이고 주관은 광복회에서 시행하였다. 답사 일행은 광복회의 추천으로 20여 명(국회의원 4, 대학교수 4, 광복회원 5, 기타 7명) 등이다. 먼저 이회영 선생의 순국장소를 둘러보고. 그 다음 여순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개관식에 참석하였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서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나간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고는 국민을 계몽시켜야 되겠다는 각오로 교수직을 정년하고는 경남매일 신문사에 근 5년을 집필하며 사회교육을 결심하였다. 또 이를 국민에게는 책으로 개화시켜야 된다는 의무감에서 신문 경남매일, 전북문화에 게재하고 이를 책자로 편찬하여 전 국민에게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결과 ‘역사 꼬집기와 토막상식’, ‘역사 트집기와 바른상식’, ‘역사 뒤집기와 시사상식’, ‘전라문화연구(29집)’ 등을 펴냈다. 뿐만 아니라 사회교육인 주부대학, 여성대학, 노인대학, 복지관 등에서 올바른 역사를 심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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