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서 극일,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 고치는 기회로
곳곳서 극일,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 고치는 기회로
  • 이대근 기자
  • 승인 2019.08.18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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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부 부국장 이대근
지방자치부 부국장 이대근

 한일 간의 경제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며 전국 도심은 촛불로 달궈지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맞선 불매 운동이 전방위로 확산되는 가운데, 시민들이 이제는 촛불집회를 통해 일본의 경제 도발을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반일과 항일을 뛰어넘는 극일을 통해 일본의 도발을 이겨내자는 분위기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일본 아베 정부의 삐뚤어진 역사 인식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일본은 반성은커녕, 독도,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 등 모든 사안을 군국주의 시대로 되돌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올해는 기미 독립 만세운동 100주년, 광복 74주년, 부마 민주항쟁 4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지역이 어디 있고 신분이 어디 있었겠나. 독립 만세운동에 동참하며 일본군에 대응한 진주의 걸인과 기생들이 새삼 주목받는다. 그리고 영화 `암살`, `밀정` 등을 계기로 최근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된 조선의열단 단장 밀양의 김봉원(金元鳳)도 재조명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조선의 3대 누각으로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가 꼽힌다. 진주와 밀양을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는 데는 분명 이들 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의열단의 고문, 단장, 단원, 후원자까지 주류가 경남 밀양 출신들이다.

 경남도는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의 아내인 박차정 의사의 묘소를 재정비하기로 했고, 창원시도 광복절날 성산구 상남공원에서 의열단을 조직한 이곳 출신 배중세 지사의 추모제를 열었다.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밀양 의열단이 널리 소개됐지만, 의열단 김원봉 단장의 부인 박차정 열사를 아는 이는 드물다. 박차정(1910~1944)은 부산 태생의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박차정의 항일 의식은 1924년 조선 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 동래 일신여학교를 입학하면서 더욱 고조됐다. 박차정 열사는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다가 이 사건으로 구속돼 풀려난 뒤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 땅으로 망명했다. 박차정은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의열단에 합류해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서 활약했다. 1931년 김원봉과 결혼했고, 1932년 10월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여자부의 교관으로 교양과 훈련을 담당했다. 그는 1939년 중국 강서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상처를 입어 1944년 중경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1945년 김원봉이 환국시 유해를 국내로 송환해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의 송산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남편이자 애국 동지인 의열단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건 독립운동가이다. 내걸린 상금은 당시 돈으로 100만 원. 지금 기준으로 하면 무려 34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만큼 일제가 두려워한 공포의 인물이 바로 김원봉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붙잡히지 않았다. 한 장소에서 두 시간 이상 머무른 적이 없다고 전할 만큼 그는 신출귀몰했다. 그는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는 의미로 의열단을 만들었고, 그 단원들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일제의 주요 시설들을 폭파하고 주요 인물들도 처단하는 데 단호히 앞장섰다. 그러나 김원봉은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뒤 1948년 남북협상 무렵에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국가검열상,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을 맡았다가 1958년 숙청됐다. 베일에 가린 그의 삶은 영화 `암살`, `밀정` 등을 계기로 최근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했다.

 밀양 `영남루`에 김원봉이 있다면 진주 `촉석루`에는 기생과 걸인독립단이 있다. 진주독립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 정오께 봉래동 진주교회(옛 옥봉리 교회) 신호용 종소리에 맞춰 시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걸인들은 일제가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간 현실을 원통해 했고,기생들은 죽더라도 나라가 독립되면 아무런 한도 없을 것이라고 외쳤다. 특히 기생독립단은 태극기를 앞세워 남강을 돌아 촉석루를 향해 행진했다.

 경제 분야에서 시작된 일본의 도발이 정치, 사회ㆍ문화 분야로까지 갈수록 도를 넘고 있는 가운데 며칠 전 일본의 한 기업이 한국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한국은 금방 뜨거워졌다가 금방 식는 나라`라고 비아냥거린 것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의 대응 전략은 분명해 보인다. 이번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장기전에 대비해야 하고 정부는 물론 민관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제강점기 그들이 사지에 몸을 던졌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 기회가 왔다. 어느 전직 대통령의 말처럼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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