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7:30 (금)
학보사의 위기
학보사의 위기
  • 어태희 기자
  • 승인 2019.08.06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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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부 기자 어태희
지방자치부 기자 어태희

 "그게 예전 같지 않다." 오랜 만에 만난 동문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얘기하는 내내 동문이 학창 시절 달고 지내던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오지 않았다. 결국, 눈물을 삼켰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입소문으로 전해 들은 학내 신문사는 평이 좋았다. 언론인의 꿈을 품고 있다면 학생기자는 당연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했기에 문을 두드리는 데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00기`라는 기수를 부여받은 이후로는 힘든 시간이었다. 당연시해야 할 학생으로서의 의무보다 학내 언론인으로서의 의무가 앞섰다.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교내외를 살피고 다녔고 학생들의 담소에도 늘 귀를 기울였다. 마감이 있는 주에는 6시간을 넘게 자본 적이 없었고 신문사 내 좁은 간이침대와 소파에 모여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다. 취재를 위해 밤중에 다른 지역을 넘어가 피시방에서 밤새 기사를 써서 보내기도 했고, 학교와 학생회와 싸우기도 했으며 지기도, 이기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 겪어온 시간은 우리의 고난, 땀과 눈물을 상회하는 어떤 가치가 있었다. 단지 선후배, 친구라는 이름으로 단정 짓지 못할 동료를 얻었다. 학생을 위한 학교를 만들자는 의결에는 어린 나이에 얻지 못할 사명과 성취가 함께 했다. 몇 평 안 되는 `학교 신문사`에는 살아오면서 얻지 못한 성장의 양분이 가득했다. 이는 같은 경험이 있는 다른 누구에게 물어도 공감할 수 있는 가치다.

 최근 학내 언론사의 위축이 눈에 보이게 빨라지고 있다. `매체의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종이를 인터넷으로 바꾸는가 하면 폐간이라는 무거운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세간은 종이매체를 `가라앉는 배`라고도 부른다. 많은 언론사가 인터넷만을 활용하고 있다. 종이보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 독자들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효율의 문제다. 이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 볼 수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따른 가치 또한 추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교 신문` 또한 이 추세에 따라야 하는 걸까?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매체라면 그 결정을 수긍할 수 있으나 학교 신문의 목적은 절대 그와 부합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학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얘기한다. 학교와 교수가 있고 학생이 있다. `지식의 상아탑`인 대학의 상관관계는 보수적이며 수직적이다. 학내 언론사는 수직관계의 가장 밑이지만 또한 가장 가치 있는 구성원인 학생을 위한 기구다. 언론사가 건재한 학교는 `학생을 위해` 학교를 견제할 언론사를 포용하는 소위 대학의 `품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다. 학교 곳곳에 있는 가판대는 학내 언론사가 건재하다는 상징이다. 독자인 학생이 한 명이라도 읽어준다면 신문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종이 신문이 사라진다면 학내 언론사는 축소되고 종래에는 학교의 홍보지로 몰락한다. 아직도 많은 학내 언론사 기자들이 종이 신문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어린 친구가 말한다. 학생의 대표는 학생회라고. 그렇다면 학생회와 학교가 학생에 반하는 한 뜻을 가진다면? 정치인은 시민의 대표로 뽑혔지만 모든 정치인이 시민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럴 때 누가 학생의 입이, 눈이, 손과 발이 되어줄 수 있는가. 요즘 유행하는 `대숲(대나무 숲)`을 대안으로 얘기하면 실소가 나온다. 그 파급력과 그 효과는 인정하나 공신력과 책임감이 없는 매체가 사실만을 얘기할까? 출처 없는 추문은 더 큰 혼란을 야기하진 않는가.

 어떤 정치를 하겠냐는 자로의 물음에 공자는 답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는 것(正名)을 먼저 하겠다."

 정명(正名), 우리는 현대에 와서 이를 통해 `이름의 무거움`을 실감한다. 어느 구성원이든 그 이름 그대로 진상에 맞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사회의 지름길이라 얘기한다. 후배들에게 얘기한다. 그대가 속한 곳은 어디인가. 그 이름 그대로 가고 있는가. 그대가 행하는 곳이 정명이 아닌 `변명`은 아닌가.

 그런 것이다. 모교의 학내 언론사가 위태하다는 얘기를 듣고 쓴 눈물을 삼킨 것은 자신이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했던 곳의 몇 십 년의 역사가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씁쓸함도 아니라, 자신이 겪어온 추억이 빛바래서 속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유에서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몇 세기가 지나도 계속해서 나오는 "요즘 애들은" 따위의 우스갯소리와 똑같다. 모든 것은 쇠락과 부흥을 반복한다. 우리 또한 완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자라고 어설픈 학생 기자였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학생을 대변하기 위해, 학교를 견제하기 위해, 발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사명과 유지가 우리가 그러했듯이 미래에도 이어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리의 사명은 거기서 다한 것이다. 그러나 학내 언론사의 위기는 이미 끝냈다고 생각하는 사명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

 앞으로의 희망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희망은 불쏘시개와 같은 것이다. 마른 불쏘시개에 숨을 불어넣듯, 관심과 도움의 손길이 이어진다면 누구도 겉잡지 못할 만큼 커다란 불길을 보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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