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담긴 '진실의 힘'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담긴 '진실의 힘'
  • 김용구
  • 승인 2019.07.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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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 차장 김용구

 

 인간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받아들일 때 감정이나 이성 중 한쪽이 우세하게 뇌를 지배한다. 통상적으로 그 사건이 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이성보다 감정의 개입이 앞선다. 예컨대 감정적인 접근이 쉬운 아동폭력 사건의 판결에 대해 죄질보다 형량이 턱없이 적다고 느낄 경우 판사가 형량을 결정한 근거를 따지기에 앞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최근 이성적인 호기심에 접근했지만 보는 내내 감정이 격앙됐던 드라마가 있다. 미국 유료 케이블 채널인 HBO에서 제작한 5부작 드라마 `체르노빌`이다. 시간은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엔지니어들은 정전 시 관성으로 터빈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면서 냉각 펌프를 작동시키는지 실험하기 위해 4번 원자로의 전원을 차단한다. 그러나 원자로에 자체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던 엔지니어들의 무지와 조작 실수가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연쇄반응으로 폭발이 일어난다.

 연구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원자로 지붕이 날아가고 노심이 그대로 공기 중에 노출될 정도로 원자로가 부서진 후였다. 노심에서 발생한 방사능 물질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인근 지역을 뒤덮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400배를 훌쩍 뛰어넘는 양이었다.

 드라마는 무능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지도부의 면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도부는 무려 36시간이 지나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킨다. 사고를 수습하던 과정에서 소방관들이 다수 사망했고, 8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고농도 방사능에 피폭됐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공산당 지도부가 사고의 수습보다 소련을 상징하는 핵발전소 사업이 인재(人災)와 설계 결함으로 폭발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바빴다는 사실이다.

 지도부는 관련 보고서에서 결함을 경고하는 내용을 삭제한 것도 모자라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원인 조사의 주역이었던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에게 법정에서 거짓말을 할 것을 종용한다. KGB는 레가소프 박사를 24시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한다.

 끝까지 양심을 지키려고 했던 레가소프 박사는 원전 폭발 사고로부터 정확히 2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 쫓기듯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가 사고 원인을 낱낱이 녹음하면서 "우리는 진실을 감췄다"는 메시지를 남긴 직후였다.

 여기까지가 타임라인을 따라 정리한 체르노빌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2011년 3월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를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두 원전 사고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체르노빌은 사람의 조작 실수에 의한 인재였지만 후쿠시마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발생한 자연재해에 가깝다. 체르노빌은 대기를 매개로 방사능이 퍼진 반면 후쿠시마는 노심이 바닥으로 멜트다운되면서 바다를 통해 오염수가 방출됐다.

 두 사고의 공통점은 소련과 일본 정부가 사고 수습 과정에서 사건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려는 정황을 보였다는 점이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주민 피난 지시가 해제된 후쿠시마현 인근 지역에서 국제 최대 권고치보다 최대 100배나 되는 고준위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으며 이런 상황은 수십 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주민 건강 위협을 외면한 채 은폐에만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또 2020도쿄올림픽 야구 개막전 등이 열리는 후쿠시마현 아즈마 스타디움 부근에는 원전 사고로 긁어낸 방사능 오염토가 쌓여 있지만,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경기장 주변의 방사능 안전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이처럼 아무리 통제하고 은폐해도 진실은 감출 수가 없다. 우리 사회는 이미 열린 사회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을 속이려 들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로는 국민 신뢰를 얻기 힘들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소련을 이끌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원전 사고를 소련 붕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권력자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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