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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부재 시대가 낳은 부작용
철학 부재 시대가 낳은 부작용
  • 이광수
  • 승인 2019.06.24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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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올해 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가 지난 17일부터 일주일 동안 실시됐다. 바칼로레아는 나폴레옹 시절인 1808년부터 시작된 대입자격시험으로 주관식 서술형 문제가 난해하기로 소문나 있다. 특히 첫날 치르는 철학시험은 우리나라 대졸자도 풀기 어려울 정도로 악명이 높다. 올해 출제된 철학 시험문제를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과연 이런 문제를 푸는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은 평소 교과과정에서 철학을 얼마나 심도 있게 공부하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올해 출제된 문제들이다. `시간을 피하는 것이 가능한가`, `예술작품을 설명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문화적 다양성이 인류의 동질성을 방해하는가`, `의무를 인정하는 것은 자유를 희생하는 것인가`, `윤리는 정치의 최선인가` 등이다. 그리고 지문을 읽고 논하는 문제에 헤겔의 `법철학`과 프로이트의 `환상의 미래`에서 발췌한 글에서 나왔다. 초등부터 대학원까지 16년을 공부하는 동안 철학을 교양필수과목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나로서도 풀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비록 우리가 서양의 물질문명을 잘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그들과 대등한 수준의 나라가 됐지만, 프랑스의 바칼로레아가 지금까지 210년 동안 유지돼 온 이유를 알만하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철학이 부재한 한국의 현실에 비춰 보면 너무나 생경한 풍경이다. 사지선다형 객관식 평가에 길들여진 한국의 모든 자격시험 및 입시(변시ㆍ행시 등 고시제외)가 객관식으로 치러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나라 대입제도의 실패가 바로 철학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결과인 것 같다. 교육 백년대계를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면서도 정작 대학입시제도는 조령모개식으로 변화를 거듭해 온 한국과는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최근 일본의 유명 경영 컨설턴트 야마구치 슈가 쓴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이 인문분야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는 서두에 `교양이 없는 전문가보다 위험한 존재는 없다`고 화두를 던진다. 철학을 삶의 수단이자 무기로 쉽게 서술한 것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필한 것 같다. 솔직히 동서양 철학의 기초를 이해하려면 서양철학은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동양 철학은 사서삼경(대학, 중용, 맹자, 논어, 서경, 시경, 역경)부터 읽어야 한다. 대개 철학 하면 고리타분하고, 공리공론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우리의 실생활에 아무 쓸모가 없는 말장난이요, 뜬구름 잡는 소리쯤으로 여긴다. 그래서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철학을 기피한다. 그런데 물질문명과 함께 문화예술 등 정신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프랑스에서는 왜 중고 과정부터 철학을 필수교양과목으로 가르치고 바칼로레아에서 그렇게 난해한 문제를 출제할까.

 다시 야마구치 슈의 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철학을 배우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네 가지로 요약해 기술했다. 첫째, 상황을 정확하게 통찰한다. 둘째, 비판적 사고의 핵심을 배운다. 셋째, 어젠다(과제)를 정한다. 넷째,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얼핏 들으면 별 깊이 있는 내용같이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마치 철학서가 아닌 경영학 해설서를 읽는 느낌이 든다. 아마 경영컨설턴트의 경험을 살려 현실감 있는 내용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다소 아쉬운 점은 동양 철학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철학의 깊이와 내용 측면에서 따져보면 동양 철학이 훨씬 무게감이 있고 내용이 심오하다. 물론 동양 철학이 너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제왕 중심의 경세적 담론에 치우친 느낌도 있지만, 관념 철학인 독일철학을 공부해보면 동양철학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왜 대 물리학자와 문호를 비롯한 독일의 지성들이 동양철학의 진수인 역경(주역)에 그렇게 심취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역경(주역)을 미신으로 금기시하니 무식의 소치인지 오만과 편견인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의 한 치 양보 없는 극한 대립과 갈등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영국 경험철학의 산물인 산업혁명의 결실을 초고속으로 성취한 대한민국은 철학 부재의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경도된 사상과 이념의 도그마에 갇혀 있다. 교육에서부터 철학이 부재한 가운데 결과 중심주의가 이룩한 사상누각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전전긍긍이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사고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 분야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결국 우리 사회를 경쟁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대립과 갈등이 점철된 철학 부재의 사회로 변하게 한다. 공자와 맹자, 칸트와 사르트르가 공리공론의 대가가 아님을 그들의 저작을 깊이 음미해보면 알 수 있는데도 애써 외면한다. 이제 우리도 프랑스 바칼로레아의 흉내라도 내는 교육풍토가 조성돼야 철학이 살아날 것이다. 노벨상이 서구와 일본의 전유물이 아니라 한국의 BTS처럼 우리 몫으로 차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학문의 기초인 철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철학 부재의 사회는 정의가 설 땅을 잃고 사이비가 판치는 가짜 민주사회와 다름없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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