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21:02 (목)
시가 노니는 상상의 역사
시가 노니는 상상의 역사
  • 하성자
  • 승인 2019.06.03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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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여가ㆍ단심가’ 속 숨은 역사

이방원의 회유와 정몽주의 충절

이성계 조선 개국 ‘혁명’ 성공에

포은, 의로운 죽음으로 맞섰지만…

 ‘한 시대를 설득하는 도구로써 문학이 기여해 온 바가 지대했던 특성을 상기해본다’라는 서설로 ‘시가 노니는 상상의 역사’란 글을 제1편 구지가로부터 시작해 경남매일에 발표했던 때가 2017년이었다. 유리왕의 황조가, 원효대사의 알랑달랑 놀아보세, 무애가 게재 이후 잠시 중단했던 주제를 새로 이어보고자 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이방원, 조선 3대왕 태종)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포은 정몽주, 고려 충신).

 고려 말 조선 개국을 준비 중이던 태조 이성계의 3남이자 실세였던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로 마음을 떠 보지만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여 자신의 절개를 꺾지 않았다. 정몽주는 이방원의 명을 받은 조영규에 의해 개성 선지교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훗날 포은의 충절을 기려 이 다리를 선죽교라고 부르게 됐다.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제거됨으로써 우후죽순 같던 충절 대의명분들은 일시에 움츠러들었고 조선 건국 혁명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공자가 제창한 유가는 공자사후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왜곡됐기 때문에 남송시대 주희는 그런 점을 배격하고 유학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정신을 세우고 형이상학적 주자학을 정립해 유가사상에 철학이란 입지를 증축했다. 충렬왕(忠烈王) 때 원나라로부터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 정신이 담긴 주자학을 도입한 이는 안향이다. 목은 이색이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일컬었던 정몽주는 주희와 안향에 이은 주자학의 정통으로, 조선성리학은 포은의 주자학을 연원해 발전하며 그 학맥을 이어갔다.

 태종 1년인 1401년, 정몽주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됐다. 이와 같은 포은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는 이방원에게 있어 ‘울며 겨자 먹기’였을지도 모른다. 조선건국이념인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실현과 조선성리학의 정통인 정몽주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되는 일이었다. 두문불출 해제 뒤로 조선초기 국정과 여론의 주축세력이 된 삼은(三隱)제자들을 포용하기 위한 목적과 권근(權近)의 요청을 받아들인 태종은 즉위 원년 정몽주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후 포은은 중종 때 문묘(文廟)와 전국 서원에 배향됐으며, 충절 또한 추앙받았다고 한다.

 우리 현대사에 소위 ‘혁명’이라 칭할 역사들이 있었기에 실로 혁명이란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생산하는가를, 옳든 그르든 시도하는 혁명가들에게 있어 얼마나 큰 용기가 요구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물며 500년 왕조를 뒤엎고 새 나라를 건국하려는 혼돈의 용트림 속에서 고려와 조선의 경계를 머뭇거렸던 영향력 있는 세력가들에게 오죽했으랴. 그들에게 있어 선택기로는 엄청난 고통이었고 모험이었을 것이다. 힘을 가진 자의 협박성 있는 회유에 마침내 휘둘린 이들은 조선개국 공신이 됐지만 끝내 제 의지를 꺾지 않았기에 포은은 죽임을 당했다.

 혁명이 성공했기에 이방원은 역적이 아닌 조선의 왕으로 우리역사에 이름을 등재시킬 수 있었다. 하여가와 단심가로 갈등했던 고려 말, 그 모든 상황들은 먼 옛날 사건일 뿐이다. 후세는 역사를 담담히 대하니 이런 시선으로 현재를 탐구하며 살아보는 태도를 현명함이라 일컬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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