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만이 지니는 남명 조식 스토리텔링 ③
김해만이 지니는 남명 조식 스토리텔링 ③
  • 하성자
  • 승인 2019.05.1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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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김해가 발굴해야 할 인물, 남명의 부인 정경부인 남평 조씨(南平 曺氏)

남명 조식의 실질적 조력가 ‘정경부인’


김해 처가서 학문 증진 지원 추정

당시 처가살이 보편타당성 풍습

48세 때 남명 합천 이주때 김해 남아

20년 넘도록 따로 거주한 ‘장거리 부부’

김해 산해정 뒷산 정경부인 묘소 ‘쌍봉’

누구 묘인지 알 수 없어 연구 필요



 이쯤에서 대동면 주중리가 친정 곳인 김해여성, 남명의 부인임으로 하여 정경부인을 하사받았음직한 남평조씨를 수면 위로 올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지속적인 교류를 했던 퇴계, 서경덕 등 학자들은 학문적 성향은 달라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때로는 경쟁하고 비판하면서 각자가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냈다. 이러한 교류가 남명에게 힘이 됐겠지만 가장 실질적인 조력자는 아마도 처가였을 것이다. 특히 정경부인 남평 조씨(南平 曺氏)가 남명의 아내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측해 본다.

 남명의 부인 조씨는 본관이 남평(南平)이다. 창녕(昌寧)조씨(曺氏)와 같은 뿌리라고 한다. 이는 유의할 점이 아닌 것이 삼국시대 이후 조선 중기까지 족혼 풍속이 있어왔고, 그 당시 일반화된 사례들이 더러 있기도 하다.

 조선 중기의 처가살이란 오늘날과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일생을 거의 친정살이로 일관하였다. 그 시대에 친정살이, 남자의 입장에서 처가살이는 최근의 사회기류가 그런 것처럼 의탁의 수준이 아닌, 보편타당성을 지닌 풍속이었기 때문에 흉 되는 일 또한 아니라고 봐야 한다. 며느리 시집살이나 사위 처가살이나 불편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므로 남명도 어쩌면 처가살이를 감수하고 학식과 명망으로 그 체면을 대체했을 수도 있겠다.

 남명이 처가 곳 김해에서 어떤 경제활동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전후 상황을 참고할 때 남명이 소위 학문을 도구로 먹고 살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산해정에서 후학을 가르친 일 또한 훗날 덕산재, 산천재를 염두에 둔 시범 교육사업 이라고 볼 때 그 또한 어떤 경제적 역할에 충족되지 못했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어머니 사후 시묘 봉행을 위해 합천에서 삼년은 남명이 처가를 떠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구실이 돼주었다는 후세의 추측은 타당성이 있다. 그 당시 일반적인 수명을 유추할 때 48세란 노령 나이에 과감히 합천으로 이주해 뇌룡정 시대를 연 남명, 경의검, 성성자로 자신을 경계했던 남명일 뿐 아니라, 퇴계나 이언적의 사생활 관련한 행적에 대해 맹렬히 비판했던 사실로 미루어 어떤 추측도 어불성설이지만, 왜 남명 부인 조씨는 남편을 따라 합천으로 가지 않고 김해에 남았을까?

 남명이 여러 번 권유했음에도 부인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끔 남명이 김해를 다녀가기도 했다지만 남명 모친 시묘 살이 포함하니 근 20년 넘는 세월 동안 부부는 산청과 김해에서 각자 따로 살았다. 조씨 부인은 남명이 66세일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남명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합천 토골에 모셨다. 즉 먼 거리를 이동해 산소를 모실 수준이 됐다는 얘기다.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떤 사유에서인지 부인 조씨 산소는 김해에 모셔져 있다.

 산청 산천재 뒤편에 있는 남명 묘소는 남명이 생전에 터를 잡은 곳이라 전하며 둘째 부인 송씨 묘소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산해정 들어가는 도로 왼편에 재실이 있고 그 뒷산에 정경부인 남평조씨 묘소가 있다. 쌍봉이다. 둘 중에 어느 봉분이 부인 묘소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정경부인 조씨 묘소, 왜 쌍봉일까? 솔깃솔깃, 이 궁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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