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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은 공존의 대상이지 비난의 대상 아니지요"
"이웃은 공존의 대상이지 비난의 대상 아니지요"
  • 박성렬 기자
  • 승인 2019.05.07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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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사암연합회장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
성각 스님은
성각 스님은 "지역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나눔 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한다.

 

 오는 음력 사월 초파일, 2019년 5월 12일(불기 2563년)은 석가탄신일이다. 음력으로 4월에 처음으로 드는 8일을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욕불일`, `석가탄신일` 등으로 부른다.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이 날에는 전국 사찰마다 석가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봉축 행사를 여는 한편, 석가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알려 행복한 사회(佛國土)로 나아가는 방향을 설한다. 남해군사암연합회도 지난달 24일 남해유배문학관 광장에서 500여 명의 불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처의 자비가 우리 사회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봉축 점등식을 열고 석가탄신일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렸다. 이에 경남매일은 `마음愛 자비를! 세상愛 평화를!` 이란 표어만큼 자비와 평화가 넘치는 남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현재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에 대한 지혜를 남해군사암연합회 성각 스님으로부터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의 속가 고향은 남해군 창선면 서대마을이다.

<편집자 주>

남해 공동체 지키는 데 나눔이 가장 중요
`마음愛 자비를 세상愛 평화를` 의미는 이웃을 나로 보고
내가 이웃이 되는 융화의 중도를 바라보는 무한 자비심

 분별심 버리고 자비ㆍ이타심 세계 찾아야

 △불기 2563년 부처님 오신 날 공식 표어가 `마음愛 자비를! 세상愛 평화를!`이다. 큰 의미를 듣고 싶습니다.

 = 최근 우리 사회가 여야의 정쟁, 좌우의 이념적 논쟁, 성장과 분배에 대한 견해차이 등에서 파생된 갖가지 사건들로 무척 혼란스럽다. 또한 방화와 반인륜적 사건 등이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면서 사회가 불안에 떨고 있다.

 혼란스럽다 못해 모든 것이 불로 태워질까? 우려되는 국면이다. 이타심, 자비심이 사라지고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는 분별력이 강하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남을 이롭게 한다거나 타인에 대한 연민이 사라지고 이웃이 비난이나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경우 이러한 혼란이 야기된다.

 `마음愛 자비를! 세상愛 평화를!`이란 표어는 사회의 여러 갈등을 자비 정신으로 극복하고 세상과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함께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웃은 공존의 대상이지 타도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꿔가야 할 잠시 머물다 가는 함께 떠나야 할 동료(공동체)인 셈이다.

 짧은 시간 머물다 가는 이곳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없어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각이 다르면 다른 데로 이해하고 함께 가야 할 불쌍한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사바에 사는 모든 이들은 원래가 하나요, 둘이 아니다.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은 틀렸고 자신만이 옳다는 분별심이 아니라 이타심이나 연민에 기초한 자비심에 반드시 기초를 둬야 한다.

 이 세상의 참모습은 수억만 년 동안 비추는 해와 같고 티 없이 맑은 창공과 같아서 청정한 것인데 분별심을 일으키는 마음에서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고 그로써 욕심과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웃을 나로 보고 내가 이웃이 되고 열이 하나가 되고 백도 하나가 되는 융화(融化)의 중도(中道)를 바로 보고 분별의 고집을 버려야 한다.

 모두가 분별심을 버리고 자비와 이타심으로 본래 청정한 극락세계를 찾아야 하겠다.

선서화가인 성각 스님이 일필휘지로 선서화를 그리고 있다.
선서화가인 성각 스님이 일필휘지로 선서화를 그리고 있다.

 생각 다르다고 편 나눠 비방해선 안 돼

 △과거 남해는 중앙 정치나 이념 등에 대한 관심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지역사회를 더욱 중시하는 공동체의식이 강한 곳이었기에 사회 구성원 간 갈등이 적었다. 그런 이유로 화합이나 단결은 그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1995년 지방자치제도 도입과 중앙 정치에 영향을 받는 지방선거 실시로 정치노선이나 이념적 이분화가 가속화되면서 지금은 공동체 구성원 간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우려하는 군민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남해 뿐만은 아니다. 이분법에 따른 남해사회의 갈등양상을 치유할 종교적 관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남해 사회뿐 아니라 타 지자체도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계속된 선거로 정치적 노선과 이념적 갈등 등으로 그 옛날 정서적으로 뭉쳐져 있던 공동체 사회가 양분화되는 등 후유증이 심각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간혹 선거 이후 가족 간 이웃 간에도 정치적 노선이나 이념이 달라 갈등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우리 공동체가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물론 정치적 생각이나 이념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돼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또한 그 정치적 생각이나 이념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강요하거나 그렇게 행동해줄 것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아울러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편을 나눠 상대를 공격하거나 비방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남해 사회라는 공동체는 정치나 이념과는 별개로 과거로부터 이어져 왔고 현재를 통해서 미래로 계속 이어질 우리들의 뿌리이지 정치적 노선이나 이념의 연속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와 이념이 내 이웃과 남해 사회를 찢는 원인이라면 그 정치와 이념은 애초 잘못된 것이다.

 정치와 이념도 만인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겠다는 근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남해군민들은 정치나 이념에서 한발 물러서 남해라는 공동체의 가치가 우선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지혜를 가져줬으면 좋겠다.

 현재 남해 사회는 정치적 노선이나 이념적 성향에 따라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 갈등의 치유는 내 생각이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는 분별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분별을 버리고 지혜로 자성(참된 나)을 찾아야 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면 이웃에서 그 생각을 따라주지 않거나 반대의 생각을 가졌다면 거리를 두게 되거나 심지어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남을 싫어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상처를 입게 된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청정했던 자신의 불성에 원망이라는 아주 불편한 무언가를 자신의 마음에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탓하고 원망하는 마음,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분별력과 관련된 모든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남해 사회가 건전한 사회공동체로 유지될 것이다.

 생각은 모든 행동의 근본 씨앗이기에 생각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웃은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공존의 대상이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새겼으면 한다.

 일찍이 선지식들은 이분법 이탈과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불성 자각을 강조하면서 탐진치의 삼독심과 반대로 사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근세 들어 성철 스님은 불행을 피하려면 양변(兩邊), 곧 상대에서 생기는 모순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사유에서 중도는 시비(是非)가 없는 극락세계라고 설한 바 있다.

 이 말을 잘 헤아려보면 좋겠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 상대적으로 이뤄져 있다. (중도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 한쪽으로 치우침으로는 어떤 해탈도 이룰 수 없고 남해 사회라는 공동체를 지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분법을 경계하고 자성을 찾는 중도(中道)를 찾기 바란다.

 나와 이웃은 일심동체며 그 동체 대비가 바로 남해공동체이다.

성각 스님의 선서화 작품.
성각 스님의 선서화 작품.

 물질 끌어 안는 삶이 깨달음 가는 길 막아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던 나눔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다. 이로 인해 남해 사회가 갈수록 삭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남해라는 공동체를 온전히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털어놓곤 한다. 나눔의 공동체, 따뜻한 정이 흐르는 남해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렵고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일이다. 이미 나눔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렵다는 이야기는 보시(나눔)를 행하는 마음을 어떻게 갖게 하느냐 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이기에 어렵다는 뜻이고 가장 쉬운 일이라는 것은 여력이 되는 사람은 보시(나눔)를 행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나눔을 행하면 뜻있는 분들이 말씀하는 따뜻한 남해공동체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행동으로 이어지는 마음을 얻기까진 쉬운 일이 아니다. 불성(佛性)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불성의 마음은 그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눔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우리는 물질에 너무 길들여져 있고 계속해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니 비우는 삶을 살기보다 물질을 계속해 사들이고 끌어안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깨달음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단어 `무소유(無所有)`는 단순히 아무것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기에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 즉, `나눔`을 실천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선지식의 무소유는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주고 또 줘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보탬이 돼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이다.

 시간과 공간마저 가지지 않겠다는 무소유 정신으로 과거 생과 현생에 저지른 모든 허물을 생사를 넘어 참회하는 큰 원력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경우에는 `무소유`는 불필요한 것을 지나치게 가지지 않거나 넘치게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남는 여력만큼 나눔을 행해 사회 환원의 공덕을 쌓고 선근을 심어달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거창한 이런 말들보다 나눔의 가치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하다. 여력만큼 나눔을 실천하면 내 이웃은 그 여력만큼 행복해지고 따뜻해진다.

 그 따뜻함을 받았기에 그 따뜻함은 또다시 이웃에게 이어진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 불변의 법칙처럼 그 나눔의 가치는 공동체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결국 영원히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 공덕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결국 남해 사회라는 공동체를 지키는 데는 (보시) 나눔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함께 하는 삶이 공동체이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不二)는 실천하는 나눔인 것이다.

 과거 이웃 간 담이 낮았을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누며 살지 않았는가? 제사 음식을 이웃 간에 나누던 그때가 남해 사회의 결속력과 공동체 의식이 강했던 시기였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공동체를 지키는 일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이웃 간에 작은 것을 서로 나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운산견청산(雲散見靑山)이요,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이라는 말이 있다.

 구름이 흩어지니 산이 나타나고 봄이 오니 스스로 새싹이 돋네. 해가 뜨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밝아지고 비가 오니 산야에는 온갖 풀이 푸르구나. 몸과 마음을 정(定)에 들어 움직이지 말고 마음의 부처를 보아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하라. 고개 돌려 들어보니 망운산에 꾀꼬리 노래하고 대숲은 우거지고 꽃은 피어좋은 시절이로다.

 회장님! 긴 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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