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만이 지니는 남명 조식 스토리텔링 ② 처가살이를 한 시대의 석학
김해 만이 지니는 남명 조식 스토리텔링 ② 처가살이를 한 시대의 석학
  • 하성자
  • 승인 2019.05.07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가난 해결 위한 ‘현명한 길’ 택하다

시종일관 당당한 기개 뽐낸 남명

부유한 김해 대동 처가살이 18년
경제 부담없자 마음껏 경의 연마
성장 마치고 합천서 교육활동 펼쳐

김해 산해정서 구전 확보 노력 필요
감춰진 처가살이 새로운 이야기 기대

 남명을 알아가노라니 시종일관 당당한 기개가 놀랍다.

 시대의 오류를 냉철하게 지적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실세인 퇴계를 향해 개인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임금이란 최고 권력을 향해 두려움 없이 합당한 도리를 과감히 주장했다. 소위 믿는 구석이 있어야 그런 힘이 나오는 법, 경의사상은 남명이 지닌 내적인 힘이었다. 그럼에도 감히 ‘그 밖에’라고 가정해 보게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듯 가난하면 누구나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흥선 대원군 일화에서처럼 아무리 왕실 일가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혈통을 내세울 자리가 주어지지 않고, 가진 지식이 굉장한 것조차 놀림감이 돼버리고, 빼어난 예술적 기질마저 초라한 말석 술 한 잔 값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남명이 김해로 오지 않고 합천에 살며 평생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그 스스로 주창한 경의사상도, 행동하는 지식인의 초지일관 의지도, 생존의 욕구와 가장이란 책임 앞에서 무릎 꿇지 않았을까? 심지어 방황하는 지식인의 초라한 전형으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라는 가정을 해 보게 된다.

 남명의 부친은 처가인 합천 삼가면 토골에서 살았으며 아드님인 남명은 일시적으로 벼슬에 나선 부친을 따라 잠깐 서울 살이 했으나 이후 서른 살까지 토골에서 살았다. 남명 나이 서른 살일 때 부친 삼년상이 끝나고, 그 해에 어머니와 식솔을 이끌고 처가인 김해로 이주해 김해시 탄동(대동면)에서 18년 동안 살았다.

 김해시 대동면 남평조씨 문중에 아호는 남명, 이름은 조식(曺植)이라 불리는 사위, 고금을 통틀어, 김해는 물론 전국적 명품 사위임에 틀림없다. 총명하고 기개 뛰어난 사위에게 경제력을 가진 처가는 아낌없이 지원했으리라. 딸을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 남명이란 인물됨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사위라는 관점을 가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경제로부터의 자유로움은 남명으로 하여금 맘껏 경의를 연마하고 실행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해 주었으리라. 남명은 처가 덕분에 경제력에 구애됨 없이 학문과 교우, 교육에 집중할 수 있었거니와 산해정을 기반으로 전국적 명망을 가진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어쩌면 처가에 큰 빚을 졌다고 볼 수 있는데 남명은 48세에 김해를 떠나 합천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더구나 그곳에서 본격적인 교육 사업을 펼쳤다. 철두철미한 준비 없이 그런 실행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남명이 학문성취와 더불어 전국적 명성 확보, 경제적 자활기반까지 처가 곳인 김해에서 획득했다고 추측하는 것이 무리일까. 남명은 왜 지리산으로 갔을까? 남명의 지리산 교육프로젝트, 그 경제적 기반은 어떻게 마련됐을까?

 궁금해진다. 어설픈 청문회라니 때도 늦었으려니와 생뚱맞기도 하다. 기개의 당당함이 남달랐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남명인 만큼 사람 사는 이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범주에서 모든 것을 추진했으리라. 남명은 그 시대 재야인사이다. 남명을 두고 그 분 발치도 못 따라갈 세속인의 설왕설래가 결례일 수도 있기에 양대 가문에 양해를 구한다.

 산해정 주변에 뭔가 있을 것 같다. 현재 김해 대동 산해정 일원에는 조씨 집성촌 흔적이 있다. 남평 조씨 문중 문서나 구전 확보 등에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남명의 김해 살이 18년 궤적 탐색은 새로운 남명스토리를 낳게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