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6:31 (금)
왜 우리는 분노 하는가
왜 우리는 분노 하는가
  • 이광수
  • 승인 2019.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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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진주시 가좌동의 한 아파트에서 조현병(정신 분열증) 환자가 벌인 끔찍한 묻지마식 방화ㆍ살인 범죄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툼이 있었던 아래층 거주 조현병 환자가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화마를 피해 계단을 내려오는 같은 아파트 사람들을 길목에서 지켜선 채 무자비하게 살상한 사건이었기에 사회적 충격이 컸다. 종종 공공주택 층간소음 문제로 다툼이 생겨 법정으로까지 사건이 비화되는 사례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의도적으로 계획된 묻지마식 분노 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범죄행위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분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사건에서 보여주듯 조현병 유무를 떠나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불특정 다수인에게 표출하는 묻지마 범죄는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지난 2008년 10월 서울 논현동 고시원 살인사건, 2012년 8월 서울 여의도 칼부림 사건,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10월 거제 선착장 살인사건 등은 지상에 보도된 대표적 묻지마 사건들이지만 보도되지 않은 사건들은 몇 배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의 범행 이유가 `세상이 나를 무시한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 직장 동료들이 나를 험담했다` 등이다. 심지어 아무런 이유 없이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분노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번 사건의 경우 정신질환자의 관리 소홀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지만 정상인과 다름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묻지마 식 범죄가 날로 늘어나고 있어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내 이웃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단절된 삶을 사는 아파트 거주자들은 이번 사건이 남 일같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 사회, 가족들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분노로 표출하는 충동적인 행동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연관돼 있다.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 경기부진에 따른 실업난 심화, 세대 간 계층 간의 갈등 고조, 정치권의 대립 갈등과 이념 분쟁 등 우리사회가 처한 제 병리현상이 이런 묻지마 범죄의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은 현실적인 삶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직면하고 있다. 남과 비교할 때 자신이 투입하는 노력에 비해 형편없는 결과물에 실망하고 좌절한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높은 현실의 벽에 실망한 나머지 자포자기하며 자살까지 감행한다. 자살률 OECD 1위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다들 쉬운 말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비우라고 위로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은 화급하기만 하다. 인간이 욕망의 제물이 된 것은 상업자본주의의 부작용이다. 매슬루의 욕구단계설이 말해 주듯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좋은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긍정적 에너지의 분출구이자 불행을 낳는 탐욕의 원천이기도 하다. 물질이든 명예든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는 것이 인간욕망의 속성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통제하는 심리기제의 발동이 안 되면 스스로 불행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 농경시대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에 따라 토지에서 생산되는 산물에는 어느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선에서 만족하며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왔다. 그러나 수확체증의 법칙이 작용하는 지식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의 욕망은 그 한계가 없는 것처럼 무한대로 펼쳐지는 세상이 됐다. 그 결과 인구의 10%가 부의 70~80%를 독점하고 금수저와 흙수저로 신분 고착이 견고화돼 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옛말이 된 가운데 상대적 박탈감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게 됐다. 견고히 구축된 황금성의 후예들은 대를 이어 호사를 누리며 람보르기니에 몸을 싣고 거들먹거린다.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운명론적 인생관은 거대한 분노의 휴화산으로 똬리를 튼 채 분출의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는 잘난 사람들의 일탈과 특권에 대한 분노를 엉뚱하게도 일반 대중 약자에게 표출한다는 게 문제다. `BBS분노의 시대`, `분노의 기술`, `2018 혐오국민보고서`에 의하면 혐오 표현 문제는 말하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 사람들 자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혐오는 싫어한다는 뜻으로 소수자를 배제, 차별하는 프로파간다이다. 지난해 분노조절 장애로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5천986명이었지만 장애 치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수십 배 더 많을 것이다. 분노를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상태에 두지 않고 변화시키는 긍정에너지로 만들면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가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풀이 수단으로 작용하면 앞서 얘기한 진주 방화 살인사건 같은 범죄가 발생하는 것이다. 분노를 분노 표출로 극복할 수는 없다. 그 분노를 지혜롭게 조절하지 못하면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질서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노력과 사회정치적ㆍ국가적 노력 없이는 제2ㆍ제3의 묻지마 범죄가 계속 발생할 것이다. 판카지 미슈라가 `분노의 시대: 현재의 역사`에서 `현재의 분노에는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과거에 범했던 분노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뭔가 진정으로 새로운 긍정적인 시도를 해 봐야 묻지마 범죄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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