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3:45 (금)
기억의 저편
기억의 저편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9.04.18 2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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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열 편집국장
류한열 편집국장

무수한 막말의 성찬에
먹을 만한 음식은 없지만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라는
원색적 비난에 분개하면서
‘진실은 떠오른다’는 믿음만은 곱씹고 싶다.

 우리 사회는 기억 너머 진실 찾기에 빠져있다. 세월호가 어두운 바닷속에서 올라올 때 진실은 햇빛에 반짝일 줄 알았다. 지난 16일 세월호 희생자 5주기에도 진실은 여전히 거친 바다에서 맴돌았다. 세월호는 세월이 흘러도 진실을 외면하고 새로운 의혹을 더해 항해를 하고 있다. ‘진실은 세월이 흐르면 드러난다’는 인간 역사가 만든 보편적 진리를 세월호는 외면하는 걸까. 김경수 경남지사가 법정구속 77일 만에 서울구치소를 나왔다. 오랜만에 자유로운 공기를 맡으면서 머리에 내린 햇살을 따뜻하게 느꼈을 것이다. 김 지사는 “1심에서 뒤집힌 진실을 항소심에서 반드시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진실이 있다면 몸을 묶든 풀든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진실은 좀체 몸을 숨기고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우리 사회는 큰병에 묶여 있다. 김 지사의 진실게임은 경남도민 모두가 알고 싶어 한다.

 우리 사회에서 만드는 진실은 순수한 진실이 아니다. 순수한 진실은 없고 상대적 진실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인 게 틀림없다. 진실은 ‘정치 공장’에서 제조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된 진실로 탈바꿈한다. 더더욱 정치 공장이 발달하지 않는 기반에서는 희안한 진실이 반듯한 상표를 달고 히트를 친다. 진실과 진실 사이에는 진실 자체가 있어야 하는데 진실 사이엔 정치적 수사가 있다. 세월호가 물속에 들어가서 나온 지 5년이 넘어도 극한 슬픔은 아직 현재형이다. 유족과 생존자의 아픔을 풀어주지 못한 우리 사회가 진실을 이리저리 굴리다 절반의 진실을 한쪽으로 몰아놓은 모양새다. 개인의 슬픔은 4월을 맞아 다시 솟아오를 수 있다. 하지만 4월을 모두가 잔인한 달로 맞는 건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기억 너머 진실이 보이지 않으니 집단적 슬픔을 해마다 맞아야 한다. 혹 진실은 다 드러났는데 진실을 팔아 이득을 취하려는 정치적인 술수가 스며있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집단적 최면에 빠진 게 아닌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김경수 지사의 조건부 보석을 두고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예상대로 서로 다른 말을 했다. 여당은 논평에서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1심 재판부가 드루킹 댓글 여론 조작 사건으로 김 지사를 법정 구속했을 땐 “사법 농단 세력의 보복성 판결”이라고 공격했다. 법치주의가 오락가락한다. 진실을 뒤로하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말이 180도 다를 수 있는 게 정치적 진실이다. 순수한 진실이 없다는 걸 그들은 얼굴색도 바꾸지 않고 보여줬다. 자유한국당은 1심 판결 땐 사법부의 판단을 높이 사더니 이번 보석 결정을 두고 “민주주의 파괴행위”까지 거론했다. 김 지사가 구치소에 나오면서 진실을 바로잡겠다고 했지만 예단하긴 힘들어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정치적 상황에서 옳고 그름 정도를 드러내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

 성숙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자기 목소리를 내다 한 방에 날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막말이 쏟아져 유족들이 힘겨워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아직 슬픔을 추스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막말 폭탄을 퍼부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들이 소영웅주의에 빠져 목숨을 걸었단 말인가. 사람들은 생각보다 어리석지 않다. 자기에게 쏟아질 비난을 감수하고 입바른 소리(자신이 보기에)를 해대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금단의 사과를 따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면서도 다른 사람의 욕심을 읽을 수 있는 영악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언덕에 올라 사과를 따 먹은 사람만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지만 남은 사람은 쫓겨난 사람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 발칙한 놈이 못할 짓을 했는데도 용기만큼은 대단했는데….” 그러면서 처음부터 못 따먹게 한 금단의 사과를 동산 중앙에 둔 하나님에게 불평한다.

 진실이 말장난 때문에 굽어지면 안 된다. 대체로 막말은 표현이 거칠수록 더 귀에 솔깃한다. 우리 사회는 5ㆍ18의 진실을 놓고도 홍역을 치렀다. 5ㆍ18 민주화운동을 무시하는 세력이 막말을 뿌려 분노를 일으켰다. 이들은 5ㆍ18의 진실을 다르게 해석하는 게 분명하다. 역사의 진실을 두고 소수 의견은 늘 존재한다. 역사 해석을 놓고 죽음을 불사한 사건은 역사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은 막말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워 되레 더 진실을 꼬이게 한다. ‘진실은 숨을 거둘 때 한순간 반짝한다.’ 진실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푸념하듯 하는 말이다. ‘그래도 진실은 살아있다’고 내질러도 메아리는 부서져 버린다.

 기억의 저편에서 진실은 떠올라야 한다. 진실이 제대로 취급받지 못해 나뒹굴어도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는 믿음까지 저버리면 안 된다. 무수한 막말의 성찬에 먹을 만한 음식은 없지만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라는 원색적 비난에 분개하면서 ‘진실은 떠오른다’는 믿음만은 곱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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