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만세운동 일어나자 22명 여학생 결사단 조직
기미년 만세운동 일어나자 22명 여학생 결사단 조직
  • 강보금 기자
  • 승인 2019.04.03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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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3삼진의거 100주년 맞아 창원 여성 독립운동가 조명

1913년 의신여학교 민족의식 함양 최봉선ㆍ안음전, 태극기ㆍ격문 제작
김두석, 식민지 정책 비판 옥고 치러 김명시ㆍ김조이, 가족과 항일운동
최덕지ㆍ조수옥, 민족ㆍ여성운동, 허성무 시장 “여성운동가 관심을”


 1919년 일어난 4ㆍ3삼진의거는 창원지역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큰 규모의 운동이었다. 진동ㆍ진전ㆍ진북 3개면에서 약 8천명이 모였는데, 당시 진동 주민이 2천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집집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여성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그 시대의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억압을 받고 살았으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보다 강했던 것이다. 4ㆍ3삼진의거 100주년을 맞아 창원지역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본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됐던 기독교인들이 광복 후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찍은 기념사진. 왼쪽 두 여성 중 위가 조수옥, 아래가 최덕지다. / (사)아침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됐던 기독교인들이 광복 후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찍은 기념사진. 왼쪽 두 여성 중 위가 조수옥, 아래가 최덕지다. / (사)아침

 1910~1920년대 마산에는 기독교가 일찍 보급되면서 근대교육기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 1913년 개교한 의신여학교는 여성들에게 남녀평등ㆍ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김조이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은 32살 때 모습이다. 193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김조이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은 32살 때 모습이다. 193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의신여학교에 다니던 최봉선, 안음전, 김남준, 이수학 등 22명의 여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결사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최봉선의 집에 모여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고, 구마산 장날인 3월 21일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최봉선과 안음전의 나이는 겨우 15~16세에 불과했다. 이후 최봉선은 ‘친일파 김기정 징토(懲討) 시민대회’에도 참여해 군중을 이끌다 1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편, 의신여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1939년 폐교되고 해방 후 의신고등공민학교로 재건, 현재의 의신여중이 됐는데 최봉선은 의신여자고등공민학교와 의신여중 교장을 역임했다.

김두석 : 월간 독립기념관(2017년 8월호).
김두석 : 월간 독립기념관(2017년 8월호).

 안음전은 결혼 후 고향 마산을 떠나 부산에 정착했는데, 해방 직후부터 부산항에서 귀환 동포들을 환영하고 구호하는 활동을 했다. 당시 부산항 주변을 배회하던 고아들을 하나 둘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던 안음전은 아이들의 수가 많아지자 사재를 털어 고아원을 지었다. 국제시장 옆 부산 최초의 아동 양육 시설인 ‘새들원’이다. 새들이란 이름은 새로운 땅(New Earth)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시 의신여학교 선생들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양한나는 1915년, 일본왕 즉위를 기념해 학교에서 떡을 돌리자 ‘먹을 이유가 없다’며 반대운동을 펼친 일화로 유명하다.

최봉선 : 현 마산의신여자중학교 초대교장 최봉선. / 마산의신여자중학교
최봉선 : 현 마산의신여자중학교 초대교장 최봉선. / 마산의신여자중학교

 3ㆍ1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활약했다. 본명도 따로 있었으나 도산 안창호 선생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내 나라를 길이 보존하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에서 ‘한나(韓拏)’로 다시 지어줬다고 한다. 양한나는 미군정기에 들어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했다. 이후 부산에서 사회복지활동에 전념하다 1976년 눈을 감았다.

 의신여학교를 졸업하고 훗날 의신여학교 교편을 잡은 김두석은 우리나라 여성 독립운동가 중 문화운동부문에서 유일하게 서훈됐다. 그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고 식민지 정책을 비판해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근대교육을 접한 여성들은 자신의 신념을 주체적으로 표출했다. 이들의 활동과 동시에 그간 내조와 보조 활동 정도로 여겨졌던 여성들의 독립운동도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안음전 : 부산 아동복지시설 ‘새들원’에 있는 안음전 석상. / 새들원
안음전 : 부산 아동복지시설 ‘새들원’에 있는 안음전 석상. / 새들원

 창원지역에서 가장 거세게 일어났던 항일독립운동, 4ㆍ3삼진의거 100주년을 맞아 지역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흉흉했던 시대인 만큼 당시에는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경우도 있었다.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난 김명시는 오빠 김형선, 남동생 김형윤과 함께 항일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녀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상해에서 사회주의운동, 조선의용군 활동 등을 펼쳤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왔지만 좌익계 숙청 바람이 불었을 때 체포돼 유치장에서 목을 매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김명시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김조이는 진해 출신으로, 남편 조봉암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5년 무렵부터 사회주의운동과 여성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해 광복 후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는데, 이는 사회주의 계열임에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창원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창원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여성들도 있다. 바로 통영 출신 최덕지와 하동 출신 조수옥이다. 최덕지는 우리나라 여성목사 중 한 사람으로,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접하고 민족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신사참배ㆍ일장기 경례ㆍ창씨개명 등에 항거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조수옥 역시 신사참배 반대운동 혐의로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광복과 함께 출옥했다. 이후 그녀는 마산에 아동복지시설 인애원을 설립해 사회복지에 앞장섰다. 170여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고, 노인병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가로 평생을 살았다.

 이처럼 항일독립운동에는 성별ㆍ나이가 중요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여성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만 부각됐던 것은 여성의 독립운동이 내조나 보조 활동 정도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남성 독립운동가에 비해 자료도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로만 불리던 여성들이 남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찾고, 가부장제와 봉건적 잔재에도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벌써 100년이 흘렀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흔적과 그에 대한 기억들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 허성무 창원시장도 “그동안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소외됐다는 평가가 많다”며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독립운동가들에 관심을 가지고 재조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창원시는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 ‘여성독립유공자 발굴 접수창구’를 운영하고 있다. 발굴된 독립유공자가 있을 경우 당사자나 유족 등이 포상 신청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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