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0:00 (토)
이천년 은하사 경내를 걷자
이천년 은하사 경내를 걷자
  • 하성자
  • 승인 2019.04.01 2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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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누구의 지난 발자국 위에 나는 지금 발자국을 찍는가? ‘영생이라는 형벌’을 삶이란 것에서 견디며 나는 어떤 형태로 감당하고 있는가? 행복이란 죽지 않는 삶이 있다면, 부디 삶이여! 은하사 경내에 스며라. 끝없이 흐르는 강물 때문에 비워도 채워지는 맘이 있다. 그것을 욕심이라 칭하니 고(苦)가 되는 것이고 애착이라 칭해도 고(苦)가 되는 것이라 사랑하자니 더 괴롭다. 어떤 것이 행복한 비움일까? 은하사 너른 경내에 스몄을 수많은 소망과 발원들을 위해 기도한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지금껏 삶 뒤끝 푸념인 것이다.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은 현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들고 배배 꼬이는 생(生)이기에 알다가도 모를 애매모호함으로 해 경험하고서도 알 수 없는, 그것이 삶이라고들 하는데 삶의 다음에 오는 삶(죽음)을 우리는 경험한 적이 있다 해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금 경험하지 않았으니 알지 못한다.

 “현재 지닌 육체의 사멸이 죽음인가?”라는 질문을 샐리 케이건은 던지고 있다. 삶 이후의 또 다른 삶의 세계, 어쩌면 그 세계를 모른다는 건 신의 가장 큰 은총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생의 발원은 종교를 태동시켰다. 종교란 이름으로 정리되고 포장됐을 뿐 영생의 발원은 태초에 시작된 모든 생명들, 특히 사람들의 절대적 존재로의 강한 의존이었던 지도 모른다.

 샐리 케이건은 예일대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로 특별히 유명해진 학자이다. 죽음을 논하는 가운데 삶을 논하고 그 끝에 삶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로 그 석학의 심오한 강의는 시작된다고 한다. 스님들도 화두를 붙잡고 선방생활을 한다고 들었다. 나의 화두는 무엇인가?

늑골에 숨어살던 승냥이

목젖에 붙어있던 뻐꾸기

뼛속에 구멍을 파던 딱따구리

꾸불꾸불한 내장에 웅크리고 있던 하이에나

어느 날 온몸 구석구석에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나와서 울부짖을 때가 있다.

우우 깊은 산

우우우 울고 있는 저 깊은 산

그 마음산에 누가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 권대웅 시 『내 몸에 짐승들이』

 짐승들이 판을 치고 있는 내 몸이지만 산도 있고 산맥도 있고 강도 있다. 어디쯤에 절을 지어달라고 할까. 터 잡기도 전에 구석구석 내 몸의 짐승들이 난리다.

 이른 아침 이 넓은 경내를 정성스레 쓴 이는 누구일까? 경내 곳곳에 대 빗살 자국마다 고뇌, 아니면 자비가 스며있을까 저어하느라 발 딛기가 죄스럽다. 그 자국이 지워지고 훼손될까 봐 두렵다. 그 스님은 깨달음에 좀 더 가까워졌을까? 저 선방에 팔순 노스님은 얼마만큼 비우셨을까?

 은하사 경내를 걷자. 물 먹는 병아리같이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땅을 보는 것이다. 물도 먹이도 땅에는 없다. 미로가 아닌 은하사 경내, 걷기의 정상경로는 망설임의 혼돈이다. 멈추고 서서 돌아보니 대 빗살 자국에 짚신벌레 무늬가 새겨졌다. 단세포 동물? 세포가 분열하고 융합하면서 욕심이란 것이 생긴 게 아닐까? 단세포인 나, 그것은 내 과거이다. 현재 내 몸뚱아리는 욕심 가득한 융합세포 승냥이, 불현듯 다른 것을 기웃거린다. 훔쳐서라도 갖고 싶은 것이 생겨난다. 저 고요한 선방!

 찌든 때를 씻어보자. 창공으로 씻어보자. 아니 씻은들 어떠랴. 하얀 구름 조각에 마음 때를 얹어버리고 빈 마음 경지가 무언지를 체험해 보는 거다. 그 와중에 구름을 낑낑 다시 당기는 나, 부끄럽지 않다. 여기는 이천 년 전에도 사랑이 넘실대었던 곳이며 지금도 그 사랑이 관용의 미리내로 흘러내리는, 하늘과 산을 하나로 이어 놓는 은하(銀河)의 절(寺)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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