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9:15 (금)
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 하성자
  • 승인 2019.03.11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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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2017년 김해시의원 해외 연수 후기>- ③

 그러지 않아도 착잡했는데 맘이 더 안쓰러워진 우리는 최대한 한인 묘소를 모두 찾아내어 예를 올려드리자면서 범위를 넓히려고 2인 1조 세 갈래로 흩어져서 묘비를 확인하기로 했다. 하나 건너 거의 한인의 묘소였기에 누군가 묘비를 확인하면 각자가 그 선 자리에서 묵념했다. 벌초삼아 해드리겠다며 묘지 가까이에 있는 풀을 꺾거나 젖히거나 밟아서 시원하게 묘역을 뚫어주는 이도 있었다. 시간은 이내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곳은 어둠이 빨리 드는 곳이라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떠냐는 안내인 장씨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저녁 특유의 어스름이 묘역 위로 의미심장하게 깔리고 있었다. 게다가 100마리는 아니라도 최소한 70마리는 넘어 보이는 까마귀 떼들이 우리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울더니 까륵까륵 울어대는 소리로 밤을 점령하려는지 허공에서 내는 까마귀 소리는 지면을 향해 꽂히듯 선명했다. 아직 찾지 못한 한인묘소가 꽤 있을 테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갑시다. 언젠가 한 번은 더 와봐야 할 곳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묘역을 되돌아 나왔다. 나오는 길목 간간이 나뭇가지에 노란 리본이 달려있기에 누가 한 거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묶어 놓은 표식이라고 했다. 이 묘역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더러 있구나. 후손 없이 돌아가셨다 해도 고인들이 조금은 덜 외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견 넷- 나는 머위가 두려워졌다. 감히 식물 따위가, 식물 따위가 두렵다니!

 탄광에서 혹사당하고 죽어 나가고 살아내며 절망했을 청년들,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이십대 전 후반 청년들, 인권을 유린당한 채 노역에 혹사당하며 나라를 잃어버린 혹독한 대가를 몸으로 온통 치러냈을 청년들의 일생들이 무덤으로 있었다. ‘일본의 신민’이란 허울 좋은 조건으로 의무를 강요당하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그 신민의 족쇄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본인이 아니었기에, 한국인으로 사할린에 남겨졌던 한국인들은 신분을 증명할 서류가 없었고 그것을 빌미로 인력이 모자란 러시아는 우리 청년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배는 신분이 확인된 일본인만 실어 날랐고 조국에서 가져올 증명서 한 장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다가 혹은 굶어서 죽고 수없이 얼어 죽은 청년들의 주검들이 코르사코프 항에 쌓였다고 한다. ‘전환배치’란 이름의 이중징용으로 다시 이용당했던 청년들, 자식과 형제의 생사를 모른 채 생병을 앓았을 한반도 땅 안에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 생이별 뒤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던 그 서러운 평생들을 공감으로 위로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발해는 사할린지역까지 그 위대한 동토의 영역을 확장했고 다스렸다고 한다. 그 자랑스럽고 힘찬 역사의 후손들이 처량한 징용자의 모습으로 사할린 땅에 발 딛었을 때 역사여, 당신은 가슴이 찢어지지 않았습니까? 나는 불현듯 그런 순간을 도래한 우리 역사 어느 지점의 그 지도력이 원망스러워졌다. 강제징용 온 청년들은 나락으로 떨어진 근대역사의 순전한 피해자들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패망했을 때 해방된 몸이 된 청년들이 그립던 고향으로 가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코르사코프 항의 광경을 다시금 상상해 봤다. 승선불허라는 러시아의 조치는 그들을 또 다른 절망감으로 후려쳤을 것이다. 역사는 그때 정신을 차릴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할 것이다. 해방이 됐어도 안에서 끼리끼리 수런거렸던 조국의 역사는 그 문제만으로도 손이 모자랄 만큼 급급했을 테니 조국의 아들들이여, 용서해 달라고, 그때는 어쩔 수 없었노라 변명할지라도. 그래도 조국이여, 당신은 그 때 당신의 청년들을 챙겼어야 했습니다. 지도자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징용자 귀향에 관심을 가지고 애써줬더라면, 러시아 정부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국적 확인과 승선 요청을 대한민국 정부가 해줬더라면 사할린의 징용자들은 징용의 아픔을 넘어 상처를 안고서라도 고향으로 돌아와 오래오래 살아가며 치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편견 다섯- 몽골의 잔재가 우리 전통 혼례식에서 신부의 족두리로 남았듯, 머위는 1세기 지난 지금도 우리 징용자 무덤을 덮고 있었다. 머위를 뛰어넘은 사할린 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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