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8:10 (목)
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 하성자
  • 승인 2019.03.04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7년 김해시의원 해외 연수 후기>- ②
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편견 셋- 나는 머위가 싫어졌다. 일본인이 사할린 지배 당시 본토에서 가져왔다는 머위, 태평양 전쟁 뒤에 일본은 사할린에서 물러났는데 머위는 지금까지 번성해 사할린을 점령하고 있었다.

 귀국이 좌절된 징용자들은 달리 살아갈 길이 없었기에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었을 나이부치 탄광 일에 계속 종사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의 한인 1세 자녀(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들도 일부도 이 탄광에서 일했으며 안내인 장씨도 그런 경우라고 했다. 그 징용자들과 한인 1세 광부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역이 근처에 있다는 장씨의 말을 듣고 우리는 오후 5시가 넘어선 시각이라 조금 무리일 수도 있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 묘역으로 가기로 했다. 구비 진 길을 꺾자마자 곧바로 오른 편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들어 40분 정도 달려가니 산 속에 편평한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300여m 지나니 공원의 농구장 크기 정도의 공터가 있고 그 주변은 온통 공동묘역이었다.

 연신 울어대는 까마귀 떼 소리는 섬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처량해 그 청년들의 원망이 서린 듯했고, 어쩌면 상주들의 울부짖음 같기도 한 것이 애절하게 들려와 마음이 어지러웠다. 토란잎만큼 넓은 잎과 시누대 만큼 키가 자란 머위는 일본인들이 즐겨 먹었기에 사할린 곳곳에 천지였다. 머위가 마치 점령군들 같이 묘지를 잠식해 있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 사이로 억새와 엉겅퀴, 달맞이꽃 등 여러 종류의 잡초들이 허리 높이만큼 우거져 앞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로 엉켜있어서 사방에 비석이 도열해 있는 속에 문득 홀로 남겨진 듯 공동묘역의 분위기는 영화의 장면처럼 으스스했다. 설상가상 안내인 장씨는 이곳은 사할린에서 가장 기운이 강한 곳이라며 한이 많은 곳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여러 명이 와서 그렇지 이곳은 절대 한, 둘이서 찾아오지는 못할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묘역으로 들어서서 풀을 헤치며 묘비를 자세히 살펴나갔다. 러시아가 탄광 문을 닫을 때까지 나이부치 탄광의 광부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안내인 장씨는 다소 흥분된 모습이었다. 이 묘역은 탄광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묻혀 있는 곳이며 어릴 때부터 인사드리고 만나왔던 한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한인 징용자 어르신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라며 한국식 이름이 적힌 비석을 같이 찾아보자고 했다. 그는 오랜만에 찾아와 고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서 고무된 표정으로 독립유공자 묘소의 위치를 어림잡아 찾아볼 테니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장씨의 뒤를 따라 우리 일행은 묘지 사이에 난 좁다란 샛길로 나누어 흩어져 러시아어나 한글로 된 한인의 비석을 찾기 위해 이름을 확인하며 나아갔다. 습기를 머금은 토양은 우리나라 같으면 흉한 터에 해당할 만큼 축축한 것이 묘지로는 도통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묘역은 늪지대의 가장자리에 굳어있는 진흙 바닥처럼 단단하고 미끄러웠다.

 한인 묘소를 발견했다. ‘안호덕(1920~1989), 이복순(1935~1985)의 묘’.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강제 징용 와서 해방 후에도 탄광 일을 했으며 폐질환으로 사망한 분의 묘소라고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린 뒤 평지가 끝나는 지점을 거슬러 낮은 구릉으로 접어들었다. 그 비탈에 ‘김광구(1943~1977)의 묘’라는 한글 비문이 눈에 띄었다. 안내인은 이 묘소는 러시아가 운영할 당시 1977년 탄광 붕괴 사고로 인해 사망한 분의 묘소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알파벳으로 된 ‘김만수(1921~1993)의 묘’, ‘황기순(1925ㆍ1ㆍ13 출생, 1984년 사망)의 묘’, ‘이인모(1918~1973)의 묘’를 보며 한인이름 같다고 안내인에게 확인을 부탁하자 달려온 장씨는 알고 지냈던 분이라며 절을 했고 그를 포함해서 우리 일행 모두는 함께 묵념을 올렸다. 다시 비탈길로 올라가며 비석의 러시아 글을 읽어보려 애쓰는데 평지 아래쪽에서 독립유공자의 묘를 찾았다는 안내인 장씨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우리는 진행 방향에서 되돌아 나와 소리 난 쪽을 향해 도로 내려갔다.

 ‘전창렬(1895.11.25.~1972. 10.20), 김성녀(1902. 4, 8.~1948. 6. 14.)의 묘.’

 눈에 띄게 큰 비석에 ‘독립유공자’라는 한글 글씨가 뚜렷했다. 누군가 비문의 글을 소리 내어 읽었고 우리는 고인에 업적을 들으며 그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기리자면서 일렬로 서서 구호에 따라 경건하게 합동묵념을 올렸다.

 독립유공자 묘소 뒤쪽은 낮은 구릉의 시작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인묘역은 대부분 독립유공자의 묘 뒤쪽에서 언덕 위로 가며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산비탈면에 제비집 같이 불안하게 앉아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묘소는 ‘박양득(1920~1973)의 묘’라고 씌어 있었다. 안내인 장씨는 이 묘소는 가족이 없이 혼자 사시던 분이라며 사망 후 일주일 지난 뒤 발견됐고 이웃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화장을 해서 이곳에 묻어드린 거라고 설명했다. 그는 덧붙여 사할린에서의 장례는 매장을 선호하며 그것이 고인에 대한 최고급의 장례예우로 보는 문화가 있으며 화장을 한다는 것은 돈이 없거나 다른 사정으로 인해 소위 급이 낮은 장례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묘소는 석재 비석인데 고 박양득의 묘는 이름과 생몰연대가 어설픈 한글 글씨로 삐뚤삐뚤하며 비목도 폐목재를 대충 잘라 사용한 듯 보였으며 그마저 비스듬히 기울어져 마치 6ㆍ25를 주제로 한 여류시인의 시 속에 그려진 국군의 비목을 보는 듯 가슴이 저몄다. 안내인은 그 당시 징용자 중에 결혼을 하지 못한 비율이 40% 정도 되며 그 이유는 태평양 전쟁 당시 젊은 여자들이 끌려가버려 사할린에 여자가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홀로 살았던 징용자들은 특히나 늙어서는 참 불쌍했다면서, 그러다 돌아가시면 마땅히 장례를 치러 줄 사람이 없어 모두들 버거워 꺼리고 외면하기도 했으며 난감해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 묘소의 경우와 같이 사망 후 발견될 때까지 방치되는 사례가 많아 결국 한인사회와 일부 이웃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매장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절차가 간단한 화장을 해서 최소한의 기본적인 장례를 치러주곤 했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