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8:02 (목)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
  • 이광수
  • 승인 2019.02.26 0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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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얼마 전 미국의 유명 정치인 존 딩겔 하원의원(민주당: 미시건)이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미국에선 존경받는 정치인의 사표였다. 59년 동안 하원의원을 역임해 최장수 의정활동 기록을 세웠다. 그의 운명 소식을 접한 미국의 조야는 일제히 존경을 표하는 조사를 발표했다. 그리고 백악관과 50개 주청사에 조기를 게양했다고 하니 그분의 59년 정치 인생이 얼마나 존경받을 만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지금은 희귀종이 됐지만,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정치인의 소명을 워싱턴에서 가장 훌륭히 수행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미국 역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처럼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유력 언론이 그를 `희귀종`이라고 칭송할 만큼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는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존 딩겔 전 하원의원이 존경받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일화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원의원 42년째 인 지난 2002년 그가 워싱턴 공항에서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려고 하자, 삑! 삑! 하는 경고음이 계속 울렸다. 보안 검색에 걸린 것이다. 젊은 시절 엉덩이 수술로 금속을 박아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검색요원에게 그 사실을 설명했으나 듣지 않고 그를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바지를 벗고 수술 부위를 보여주자 비로소 검색대를 통과했다고 한다. 바지까지 벗는 수모를 당하고도 그는 자신이 하원의원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서 한다는 말이 "미국의 하늘은 안전하구나"하고 너스레를 떨며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런 충직한 검색원이 있어서 미국의 국가안보가 튼튼히 지켜진다는 신뢰감에서 한 말일 것이다.

 오랫동안 하원의원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었지만 특혜를 바라지 않는 그의 모범적인 행동이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은 것이다. 공항검색원의 신분증 제시요구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나리 행세로 소란을 피운 한국의 어느 국회의원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를 느낀다. 제대로 된 인격부터 갖춘 후 정치를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볼멘소리가 괜한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위의 존 딩겔 의원의 행동에서 보듯이, 사람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존경의 대상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삶을 살든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존경은 고사하고 욕이라도 안 듣고 살다가 죽으면 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이다. 하물며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정치인은 아니지만 존경받는 두 분 큰 어른이 계셨다.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두 분 종교지도자 `바보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그런 분이었다. 김 추기경이 지난 2009년, 법정 스님이 2010년에 타계했는데 아마 두 분께서 서로 그리워해서 1년 차이로 하늘나라로 가신 게 아닌가 싶다. 이 두 분은 지금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존경하는 큰 어른의 영원한 표상으로 남아있다.

 왜 우리는 지금 존경하는 어른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을까.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넘기면 다들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이 올 거라고 기대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다. 그리고 대망의 선진국 대열인 1인당 GNP 3만 불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국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우리 정치판에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직 권력투쟁에만 함몰돼 헤어나지 못한다. 어렵게 성취한 경제 선진국의 위상은 하강의 벼랑 끝에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사법 정의가 무너져 불신감이 팽배한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으로 갈라진 채 이념논쟁으로 날 밤을 지새우고 있다. 목소리 큰 사람, 깃발 먼저 드는 사람이 왕 노릇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 천재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뽐내며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K-pop의 방탄 소년단과 토트넘의 손흥민, LPGA의 걸출한 골프여제들은 우리의 자랑이자 세계인의 우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귀다툼의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어른이 없는 세상이 두려운 것은 삶에 지쳐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정신적 지주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될 지성은 내로남불의 여론몰이에 몸을 사리며 침묵으로 일관한 채 수수방관 뒷짐만 지고 있다. SNS에 떠도는 `카더라` 한 방에 한 인격체의 인생과 영혼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막가파식 프로파간다가 민심을 호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쟁에서 뒤처진 서민들과 꿈을 잃은 청춘들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이 땅의 청춘들에게 모험과 도전은 언감생심이요, 오직 안전판과 보신만이 살길이라고 공직에 올인한다. 가진 자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서민들은 철벽처럼 꽉 막힌 현실 앞에 속수무책 한숨만 짓고 있다. 존경할 어른이 없는 세상에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무뢰와 방종이 판치는 가운데 존경과 신뢰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한국판 존 딩겔과 위 두 분 같은 어른이 없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그렇다고 네 탓 내 탓으로 시간 낭비만 할 때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뒤돌아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 봐야겠다.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 해답이 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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