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1:30 (금)
하동 독립운동가 46명 서훈 신청
하동 독립운동가 46명 서훈 신청
  • 이문석 기자
  • 승인 2019.01.02 17: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동서 3ㆍ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 중 한명인 여태원 선생.
하동서 3ㆍ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 중 한명인 여태원 선생.

군ㆍ도독립운동연구소

옥고 치른 강대용 선생

세 식구 독립운동가 포함

1차 25명 이어 2차 추진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27년 하동에서 제2의 3ㆍ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의 수형기록을 3ㆍ1운동 100년 만에 찾아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다고 2일 밝혔다.

 여기에는 제2의 3ㆍ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강대용(姜大榕ㆍ하동군 악양면)ㆍ여국엽(余國燁ㆍ악양면)ㆍ여태원(余太元ㆍ악양면) 선생 등 13명과 3남매 독립운동가 조복애(趙福愛ㆍ옥종면), 대를 이은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박성무(朴性茂ㆍ적량면), 옥중 순국한 정석용ㆍ이형석ㆍ이기호 선생, 호남출신 최백근(광양시)ㆍ김용상(정읍시)이 포함됐다.

 이번 독립운동가 발굴은 지난해 3월 윤상기 군수와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군내 미발굴ㆍ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2년간 추진키로 함에 따라 지난해 1차 발굴자 25명의 서훈신청에 이어 이번에 2차 발굴자 46명의 서훈신청이 이뤄졌다.

 정재상 소장은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형사공소사건부’ㆍ‘집행원부’ㆍ‘일제감시카드’ㆍ‘경남도 보고서’ 등의 자료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27년 하동에서의 제2의 3ㆍ1독립운동을 주동한 13명의 수형기록과 여성독립운동가 조복애 선생을 포함,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등 46명의 항일행적이 담긴 수형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1927년 하동서 제2의 3ㆍ1운동 거사 = 이번에 발굴한 문건 중에 1927년 하동에서 제2의 3ㆍ1운동이 일어났음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악양면 출신 강대용ㆍ여국엽ㆍ임성필ㆍ여태원ㆍ송우복 선생 등 20여 명이 1926년 12월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 선생의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규탄하는 시위를 모의했다.

 강대용(당시 41세)ㆍ여국엽(36세) 선생은 1927년 하동ㆍ광양지역 등 뜻있는 인사 100여 명에게 비밀리에 연락, 하동장날을 기해 대규모 일제 규탄 시위를 하기로 했다.

 선생은 같은 면 중대마을 임성필(47)ㆍ노종현(30)ㆍ이시용(30)ㆍ여성원(27)ㆍ여태원(24)을 규탄시위 총 연락책으로, 정동마을 송우복(42)ㆍ조한식(39), 동매마을 김수룡(29)ㆍ강상용(23) 등을 중심으로 빈틈없는 거사 준비를 진행했다.

 또 선생은 하동ㆍ적량ㆍ고전 지역은, 하동읍 두곡리 거주 김삼륜(32)을 총책으로 했다. 그리고 인근 전남 광양지역은 진상면 섬거 출신으로 악양면 정서에 거주한 김무일(22)을 연락책으로 했다. 거사일은 하동장날인 3월 3일로 정했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지역인사는 광양군의 골약면ㆍ다압면ㆍ진월면ㆍ진상면의 김태수(30)ㆍ최한원(23)ㆍ최영근(22)을 포함, 300여 명에 달했다. 시위는 인근 주민과 상인 장꾼 500여 명도 가세했다. 시위대는 점차 늘어나 1천여 명에 달했다.

 강대용ㆍ여국엽 선생은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하동경찰서와 군청을 향해 거친 행진을 하면서 ‘조선민족 억압하는 모든 법령을 철폐하라’, ‘일본인의 조선이민을 반대한다’, ‘경작권 확립을 보장하라’, ‘부당한 납세를 반대한다’, ‘모든 학교 교육은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제를 규탄했다.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다급해진 일본경찰은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일본경찰과 충돌, 진압 경찰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같은 일로 강대용ㆍ여국엽ㆍ여태원ㆍ임성필ㆍ송우복 선생 등 중심인물 50여 명이 일본경찰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30여 명이 재판에 넘겨져 주동자 강대용ㆍ여국엽 선생 등 13명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騷擾)ㆍ상해(傷害) 등의 죄목으로 형이 확정될 때까지 징역 2년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문건을 분석한 정재상 소장은 “1927년 하동에서 1천여 명이 가담한 제2의 3ㆍ1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났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며 “이는 영호남지역에서 1919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로 평가된다. 이때 50여 명이 연행돼 30여 명이 재판에 넘겨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러한 내용들이 지역향토사에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어 안타깝다”며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잊힌 항일영웅들에 대한 예우에 우리 사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