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8:33 (금)
사람 내음 가득한 서마산 관문 ‘석전동’
사람 내음 가득한 서마산 관문 ‘석전동’
  • 이병영 기자
  • 승인 2018.11.11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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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ㆍ관광자원 통해 관광도시로 도약

공공기관ㆍ각급 병원ㆍ은행ㆍ통합역전시장 등

 기계공업의 메카로 불렸던 창원시가 새로운 미래 먹거리 마련에 전력을 쏟고 있다. 창원국가산단을 중심으로 구조고도화를 통한 제조업의 첨단산업화와 함께 공업도시라는 명성에 상대적으로 잊혀졌던 문화ㆍ예술ㆍ관광자원을 통해 관광도시로의 도약도 꿈꾸고 있다. 이와 연계해 ‘창원 58열전’이라는 가제로 지역 내 58개 읍면동의 면면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지역 활성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에 본지는 창원시 공보관실 이상원 주무관의 자료를 제공받아 열 번째로 마산회원구 ‘서마산의 관문 석전동’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서마산의 관문 석전동, 그곳엔 언제나 사람 내음 한가득하다.

▲ 마산의 관문 마산역 전경.

 창원시 마산회원구 석전동은 면적 1.61㎢(창원시 면적의 0.21%)에 주민은 1만 4천500명으로 도심 면적에 비해 비교적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지금도 지역 중심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한창 건설 중에 있어 더 많은 주민 수의 증가도 예정돼 있다. 이렇게 넓지 않은 지역을 많은 사람들이 부여안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건 석전동의 지리적 위치와도 관계가 있다.

 석전동은 마산역과 남해고속도로 서마산 나들목이 있어 서마산의 관문역할을 하고 있는 등 오래전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석전동은 원래 돌이 많은 지역이라 돌밭 또는 석전(石田)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는데, 이곳 일대에 자리 잡았던 근주마을이 있었다.

▲ 근주공원.

 특히 조선시대에는 근주역(近珠驛)이 지금의 석전동 일원에 있었다. 공무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키 위한 목적으로 조선 시대에 실시됐던 역제(驛制)는 근대적인 교통수단이나 통신 시설이 발달치 못했던 시대에 교통로의 형성과 운영 등 교통 체계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석전동 일원에는 근주역의 흔적이 남아있다. 북쪽 야산에는 근주역 역참의 찰방(察訪)을 지낸 관리의 찰방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 근주마을의 이름을 딴 근주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마산역으로 이어지는 경전선 철길 밑에 마련된 공원 이름도 근주공원으로 명명됐다.

 근주역의 명맥은 마산역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열차가 발착하는 곳이라 해 예전의 역과는 의미가 달라졌지만 여전히 마산역에는 타지를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또 마산역은 오랜 역사와 함께 마산시민들의 애환도 함께 해왔다.

▲ 번개시장.

 마산역은 원래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신마산’이라고 불리는 마산항의 일본인 거주지에 있었다. 일제의 물자수탈 등 화물운송을 위해 역이 들어섰고 지난 1927년 4월에 여객운행이 시작되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마산을 오가기 시작했다. 이후 마산역은 1977년 12월에 구마산역, 마산역, 북마산역을 통합해 현재의 석전동에 자리하게 됐다. 마산역 통합에 따라 옛 선로는 임항선으로 존치됐다가 상당수 구간은 철거돼 ‘임항선 그린웨이’라는 공원길로 변모했다.

 석전동엔 늘 사람들로 붐비다 보니 자연스레 지역기반 은행의 본점도 위치해 있고, 또 많은 공공기관과 각급 병원, 은행 등도 자리하고 있다. 또 마산역 인근의 번개시장과 통합역전시장, 그리고 근주공원 인근 서마산시장 등 석전동 내에 전통시장도 세 곳이나 된다.

 특히 마산역번개시장은 지난 1977년 마산역이 지금 위치로 옮겨오면서 생긴 새벽시장이다. 새벽 열차를 타고 인근 함안, 진영, 진주 등지에서 할머니들이 잡곡이나 텃밭에서 직접 키운 야채를 팔러오면서 시작돼 지금도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10년 KTX가 운행되고 2013년 시설 현대화 사업을 통해 상권이 현대화됐지만 그래도 새벽이면 값싼 채소들을 판매하는 좌판이 주를 이루면서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인다.

▲ 봉화산 오르는 길.

 석전동 외곽엔 무학산의 지맥인 봉화산이 자리해 있다. 봉화산(265m)은 석전동과 인근 회성동, 회원동으로 이어지는 주택지에 둘러싸여 있고 정상까지의 거리가 0.8㎞에 불과하다 보니 평일에도 운동복차림의 주민들이 산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또 둘레길도 잘 정리돼 있고 가파르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봉화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봉국사(1949년에 창건된 사찰) 입구에는 봉화산으로 오르는 무학산 둘레길의 출발점이 있다. 이곳에서 보통걸음으로 봉화산 정상까지 20분이면 충분하다.

 둘레길을 따라 봉화산 정상에 다다르기 전 둥근모양의 석벽으로 쌓인 봉수대가 눈에 들어온다. 경남도기념물 제157호인 봉화산 봉수대는 언제 쌓은 것인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려 말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 위급 상황을 서울에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쌓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성황당 봉수대’로 표기되고 있다고도 한다. 창원 지역을 자주 침범해 노략질했던 왜구에 대비하고자 봉화산 봉수대를 세웠고, 조선 시대까지도 계속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경남도기념물 제157호 봉화산 봉수대.

 봉수대에선 석전동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봉수대 인근엔 잠시 여정을 풀 수 있는 쉼터도 두 곳이나 된다. 그곳에선 마산앞바다도 훤히 보인다. 적의 침입을 알리려 한걸음에 올랐을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오른 봉화산은 산 아래의 바쁜 일상과 달리 한적함마저 든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자니 문득 이곳은 여느 명소 못지않게 해돋이를 보는 장소로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산소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별다른 반대급부 없이도 숨을 쉬도록 해주고 있기에 그 소중함을 잘 몰랐다. 마산역과 서마산 나들목을 들락거리면서도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는 생각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이들의 삶터가 되고 이야기가 있고 사람 내음이 가득한 곳, 석전동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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