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23:49 (화)
`전자유통업계 대부ㆍ강소평ㆍ작은 거인ㆍ박사두뇌…`부산과기대 강기성 총장
`전자유통업계 대부ㆍ강소평ㆍ작은 거인ㆍ박사두뇌…`부산과기대 강기성 총장
  • 김세완 기자
  • 승인 2018.09.17 1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작농 맏이로 전자유통업 성공신화 `거목`

유능한 직원…팩터링 전담ㆍA/Sㆍ방판 주력

 

▲ 부산과기대 강기성 총장은 지난 2001년 1월 부산정보대학(부산과학기술대학교의 前교명)의 6대 학장 취임해 본격적으로 대학경영에 주력하고 있다.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가난을 이겨내고 전자유통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 뒤 배우지 못한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육영사업을 펼치고 있는 부산과학기술대학교 강기성 총장.

 열네 살 때 고령토광산의 막일꾼으로 출발해 지금에 이른 그의 삶은 단순히 한사람의 인생역정을 넘어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 근대화 세대가 성공을 일궈가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지는 그를 만나 일대기를 들었다.<편집자 주>

◆ "조국은 나에게 가난과 함께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감을 주었다"

 `전자유통업계의 대부, 강소평, 작은 거인, 박사두뇌ㆍㆍㆍ` 내가 전자유통업계에서 성공을 거듭하던 시절 주변에서 나에게 붙여준 별명들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를 들먹이는 것은 이 별명들이 내가 가난이라는 장애물을 딛고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것을 우회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41년 경남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에서 부친(강차열ㆍ1969년 작고)과 모친(문필순ㆍ81)의 3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작농이었던 우리 집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4년 공출과 강제노역을 피해 친척들과 만주로 집단이주해 2년여 간 생활하기도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어린 기억이었지만 만주의 낯선 땅이 오히려 일제의 강압에 시달리던 조선보다 풍족했던 시절, 조국은 내게 가난과 함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48년 나는 인근 북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쪼들리는 형편이 쉽사리 펴지질 않아 공부보다 집안의 생계를 잇는 것이 더 중요했다. 똥장군과 볏단 짐을 지면서 날품팔이 생활을 했고 겨울에는 장작을 패 장에 가서 팔았다. 당연히 학교를 빼먹는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눈이 내리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남들은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이런 날 나는 어김없이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이런 날은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때, 공부를 열심히 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남의 집 품팔이만 해야 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며 무엇이든지 살림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한창 뛰어놀 나이에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그나마 학교와의 인연은 초등학교로 끝이었다. 1954년 열네 살 되던 해 나는 인근 고령토 광산에 막일꾼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고생이 태산 같이 내 앞에 버티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내 힘으로 타개해 나가리라 굳게 결심한 터였다. 새벽밥을 먹고 광산에 가서 저녁때까지 채굴을 하고 철 수레를 미는 중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땔감을 져다 날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감독에게 인정받을 만큼 열심히 해 어른들과 똑같은 노임을 받았다. 이 때문이었을까? 나는 일을 하면서 육체적인 피로감보다는 정신적인 생동감을 느꼈다. 자부심이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을 희열에 잠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럭저럭 2년 동안 고령토를 파고 뼈가 부서져라 일을 했지만 좀처럼 형편이 나아지진 않았다. 전쟁으로 사회는 피폐할 대로 피폐했고 어떻게든 굶어죽지 않고 살아야만 했다. 곤궁과 고통에 시달리던 시기, 고령토 경기도 좋지 않아 노임이 체불되기 일쑤였고 돈이 나오더라도 찔끔찔끔 지불됐다.

 나는 이미 고령토 채굴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터라 광산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짐작했다. 설사 비틀거리며 유지된다 하더라도 내가 광산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을 지도 불투명했다. 생계를 이어갈 방도를 찾아야했던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회지로 나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당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공부를 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나는 경우와 가난을 이기지 못해 이를 벗어나려고 하는 경우였다. 나는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나는 부산 범일동에서 품삯을 받고 노동일을 하는 육촌형에게 "구두닦이도 좋고 껌팔이도 좋다"며 떼를 써 어렵게 허락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열여섯이 되던 해인 1956년 3월, 맨주먹으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 전파상 전자수리공 시절은`중앙라디오`창업의 발판이 되다

 나는 제3육군병원 범일동 분실에서 잡일을 하며 첫 부산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휴전 3년 후인 1956년이었다. 병원은 팔다리가 절단된 장교들이 머물던,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3개월 쯤 일했을 때, 남포동 가구점에서 일하던 외사촌형이 근처 전파상인 `고려라디오`에서 사람을 채용한다며 소개해줬다. 이 당시 외사촌형이 다른 분야의 직장을 소개해주었더라면 나의 인생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1978년 당시 금성사 가전제품 유통판매왕에 뽑혀 금성사 박성찬(사진 왼쪽-작고)사장으로부터 상을 받고 있다.

 면접을 통해 뽑힌 나는 `고려라디오`에 야전침대를 펼쳐놓고 숙식을 하며 생활하게 됐다. 당시 전자제품은 물품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해 진열된다 싶으면 팔려나갈 정도로 소비자들의 구매욕구가 대단했다.

 독일제 전축 한대 가격이 광복동 20평짜리 집 두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고가였고 흑백텔레비전도 없어서 못 파는 정도로 부유층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전자제품들은 모두 일본산, 미국산, 독일산 등 외국 제품 일색이었다. 우리 흑백TV가 등장한 것이 1968년께였으니 이전에는 외제가 판을 친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라디오`는 다른 점포보다 판매와 수리 등 모든 면에서 앞섰고 나도 수리기사를 따라다니거나 배달을 하면서 일을 배워갔다.

 나는 전자제품 수리기술을 익히기 위해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처음 라디오를 분해했을 때 영어와 독일어 투성이 부속과 설명서 때문에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하면서 라디오 조립기술을 배웠다. 모르면 이웃 전파상의 기술자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며 TV와 전축까지 기술을 습득, 당당한 수리기술자로 인정을 받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나는 그 후 10년 간 `고려라디오`에서 일하며 사업을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6천 원, 기업체 초봉이 6천~7천 원이었으니 1만1천 원의 월급을 받던 나는 고임금자에 속했다.

 나는 드디어 1966년 9월 `고려라디오`를 그만두고 광복동에 `중앙전파사`를 창업했다. 총 자본금 55만원으로 30평 남짓한 단층기와집에 진열할 상품 하나 없이 개업식을 치렀지만 `친절과 신뢰`를 무기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럭저럭 인정을 받으며 자리를 잡던 내 사업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승부수가 떠올랐다. 바로`월남특수`였다. 1964년 9월부터 시작된 월남파병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긴 했지만 한국경제를 살리는데 엄청난 효자노릇을 했다. 특히 참전 군인이나 기술자들이 부산항을 통해 들고 들어오는 수많은 전자제품은 훌륭한 공급선 역할을 했다.

 나는 "이번이 내게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금을 최대한 융통해 수입상을 찾아다니며 물품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나는 사지에서 일하다 돌아온 사람들의 물건인 만큼 후한 가격을 쳐주고 현금으로 구입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과욕은 인품을 실추시킬 뿐만 아니라 사업까지 망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팔 때도 적정가격 이상을 부르지 않았고 평판도 점점 더 좋아졌다.

 덕분에 `중앙전파사`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5년 동안 최대 호황을 누렸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대형전자상가들도 우리와 거래를 트려고 애쓸 정도로 급성장을 했다

◆ `팩토링` 판매방식 개발로 전자유통업계 1인자로 올라서다

 중앙전파사에서 어느 정도 재력을 쌓은 나는 사업을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1972년 9월 가전제품 제조회사인 금성사의 판매센터(대리점)를 개설한 것이다. 이 시기는 국내에도 가전제품 생산업체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으로 판매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전국 각 지역마다 대리점형태의 유통망을 구축해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품업체가 판매망을 중시하면서도 판매승인을 하는데 배짱을 부릴 때여서 대리점을 내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대리점을 하려면 자금력과 신용, 판매능력을 인정받아야 할 만큼 이 사업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하지만 국내 전자산업이 겨우 걸음마 수준이어서 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거의 모든 전자제품이 입고되기가 바쁘게 팔려나갔다. 당시 중앙전파사의 우수한 판매실적과 신용이 큰 몫을 해주었다.

 나는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고 빈틈없이 정성을 들여 판매와 사후서비스(A/S)에 나섰다. 소비자들의 심리는 묘했다.

선친 뜻 이은 육영사업으로 교육계 발 담궈

최첨단 시설 등 전국 최고 교육인프라 구축

 같은 시기 출시되는 전자제품은 외양만 다를 뿐 성능은 엇비슷한데도 소비자는 대중심리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오늘 안 팔리던 물건이 내일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점에 착안해 1977년 겨울이 다가올 무렵 금성사 본사로 가 한꺼번에 냉장고 7천 여 대를 주문했다. 당시 금성사의 연간 생산량 2만 대 가량의 3분의 1을 한꺼번에 주문하니 금성사 측에서도 깜짝 놀라 납품을 주저하기까지 했다. 일단 물량을 확보한 나는 이를 소비자들의 안방에 들여 놓기 위해 봉급생활자 등 중산층을 타깃으로 현금가 할부판매라는 것을 창안했다. 5개월에 걸쳐 물건 값을 나눠 내도록 하고 지역 일간지에 광고도 크게 냈다. 한마디로 모험을 건 셈이었다.

 그러나 이 할부판매 형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은 보편화됐지만 당시에는 국내 최초로 선보인 판매기법이어서 소비자들은 날마다 물품을 구입하려고 우리 판매 센터 앞에서 장사진을 이뤘다. 이 판매전술은 중산층과 서민층에 파고들어 예상을 뒤엎는 판매기록을 냈고 전국의 대리점들이 일제히 할부판매에 들어갔다.

 사업의 외형은 자꾸만 커져 갔다. 덩달아 세금도 엄청나게 납부하게 되면서 법인체 설립의 절박성을 실감해, 1984년 5월 `(주)왕신`이라는 법인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이미 전국적으로 전자제품 대리점이 곳곳에 들어서 일반화 되고 있었다. 제품도 비슷하고 가격도 대동소이했다. 이러한 시장상황에서는 소비자들을 위해 새롭고 신선한 물품대금지급방식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팩터링제도`였다.

 이 제도는 금융기관과 계약을 맺고 고객 대신 금융기관이 구매대금을 판매업자에게 지급해주고 고객은 금융기관에 분할해 대금을 지급하는 일종의 금융기관을 이용한 외상거래 방식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판매방식이었다.

 나는 엄선한 직원들로 팩터링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방문판매팀도 만들었다. 팩터링방식과 방문판매는 대성공을 거둬 단번에 판매실적 전국 1위를 차지했고 이후 5~6년 간 1위를 고수했다. 전자유통업계에서는 나의 판매방식을 따라 하기에 바빴고 금성사에서도`전자유통업계의 1인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전자유통업계의 정상에 섰다고 생각한 나는 학교사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가졌던 교육 사업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준 육영사업에 몸을 던지다

 육영사업은 돈을 벌기 위해 일찌감치 공부를 접어야 했던 나의 꿈이기도 했지만 아버님의 꿈이기도 했다. 어릴 적 만주로 향할 때 아버님은 내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여러 사람이 공부할 수 있는 서당을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교육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보니 나에게는 이전 사업을 확장하던 때와는 비할 바가 안 되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전자유통업이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었다면 교육 사업은 돈을 써야 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혀 생소한 분야로 뛰어들다 보니 실수가 없을 수 없었다. 특히 1984년 학교를 짓기 위해 부산 사상구 주례동 산림청소유 국유지(현 주례LG아파트)를 매입하려던 계획은 사기에 휘말릴 뻔하면서 무산돼 버렸다.

 그러나 학교경영에 대한 나의 열정과 바람은 뜻밖의 기회로 찾아왔다. 마침내 1985년 학교를 신설하는 대신 기존 학교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경영부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부산전문대학을 인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는 부지확보 등 학교설립이 생각처럼 쉽지 않을 바에야 인수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과감히 인수키로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벌어 놓았던 재산을 인수자금으로 투입하다 보니 사업의 축소가 불가피하게 됐고 자연스레 전자유통업과는 멀어지게 됐다. 중간에 계약이 취소되는 소동을 겪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1986년 정식으로 대학인수에 합의한 나는 본격적으로 대학경영에 뛰어들었다.

 1977년 3월, 성지공업전문학교로 출범한 이 학교는 부산 남구 우암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학률이 저조해 운영이 어려워지자 건설회사가 이 대학을 인수했으나 이 건설회사 마저 북구 구포동으로 이전한 직후 부도가 나 인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수 후 운동장과 하수구시설도 없이 건물 두 채만 덩그러니 놓인 학교를 보자 "이제 내 책임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뭘 하겠다고 대학을 인수했나?"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내가 교육 사업에 뜻을 둔 것은 내 평생의 뜻을 이루는 것임과 동시에 그동안 내가 쌓아온 재산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세속에 물들여지지 않고 정이 넘치는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고 우리 대학 출신 학생들이 따뜻한 가슴을 가지게 하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 우선적으로 교육기반시설 확충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89년부터 준공되기 시작한 학내 건물들은 인수 30여 년이 지난 지금 모두 17개 동으로 늘어났고 최첨단 시설의 학생복지센터와 자동차공학관, 정보센터(대학 본관) 등을 갖춰 명실 공히 전국 최고 수준의 교육 인프라를 구축한 대학으로 급성장했다.

 나는 지난 2001년 1월 부산정보대학(부산과학기술대학교의 前교명)의 6대 학장 취임으로 본격적인 대학경영을 시작했다. 대학도 이전과는 달리 경영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일선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경영마인드를 학교에 접목시키고 싶었다.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많은 대학들이 도태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고 자부한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지금까지 나의 미래를 열어왔던 것처럼 젊은이들의 미래를 열어주는데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