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9:05 (목)
꿈의 충전소
꿈의 충전소
  • 은 종
  • 승인 2018.06.21 21: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은 종 시인ㆍ독서지도사ㆍ심리상담사

 잉크액이 다 소진돼 문구점으로 가봤다. 왁자지껄하던 옛날의 학교 정문 앞의 그곳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비슷한 종류의 물품을 매대에 올려놓고 그 위에 번호를 달아 고객이 잘 찾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초등학교 시절, 하루의 수업이 다 마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종례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내일 준비물이나 숙제를 일괄적으로 내주시는 시간이었다. 그 중요한 정보를 놓치면 다음 날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준비물이나 숙제 내용에 쓰일 재료를 사기 위해 문구점에는 항상 아이들로 붐볐다. 전날 준비 못 한 아이들은 다음 날 등교 시간을 틈타 구매하느라 가게 주인의 손은 또 얼마나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지, 그리고 지금처럼 오락시설이나 방과 후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 보니 아이들의 놀이재료는 그곳에 다 모여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인형에 스티커 붙이기 놀이나 남자아이들은 구슬이나 딱지 등으로 놀이를 일삼았다.

 나는 지금도 색종이를 유별나게 좋아한다. 갖가지 색상으로 덧입혀져 있는 천연의 빛깔은 비가 온 후 들판 위로 퍼지는 무지갯빛 같기도 하고 모양은 말린 과일을 절편 해서 끼워둔 것 같기도 하다. 비닐을 뜯어 사각의 색종이를 코끝으로 당겨보면 깊은 곳, 숲의 냄새가 난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색은 연두색이다. 배경이 밝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신선함을 준다. 책갈피 속에 끼워뒀다가 꼭 적고 싶은 문구를 적어두기도 하고 친구나 동료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쪽지 편지지로도 사용한다. 색종이는 여러 가지 접기 놀이도 가능하다. 독서지도하면서 아이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창의력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문구점은 아이들의 꿈을 키우는 충전소와 다름없다.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자신의 이상과 세계를 표현하는가 하면 풀이나 가위로 여러 형상을 오리고 붙이기도 하면서 가꾸고자 하는 열망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내면에 억눌려있던 자신의 욕구가 분출돼 감정을 해소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미술치료를 통해 자신만의 감정을 묘사해 낼 수 있어 상담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요법 중의 하나다.

 단순히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도구들을 이용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보면 수십 년간 쌓여있던 감정의 찌꺼기들도 달아날 것이다. 문구들 또한 자신의 머리 위로 먼지가 앉을 때까지 주인공의 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문방구점에 갈 때마다 깨끗하고 새로 들여온 물품보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제품을 손으로 집어 올려다본다. 말없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들의 소중한 숨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꼭 쓰여야 할 자리에 옮겨져 아직 펼치지 못한 그들만의 꿈들이 세상을 향해 마음껏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네 어귀에 노랗게 황매화가 피던 시절, 하교 시간에 풀빵을 사서 먹고 싶어 그 꽃송이들이 동전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한 곳도 문구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월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달고나(일명 오리 떼기)를 만들어 먹던 그 아이들을 다 어디로 흩어버리게 한 걸까, 아마 가슴 속, 꿈들을 채우면서 지금쯤 지구 한 모퉁이를 책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사 심심할 때 나는 지금도 가끔 문구점을 기웃거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