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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행위, 어디까지 보는가?
성추행 행위, 어디까지 보는가?
  • 권우상
  • 승인 2018.04.10 2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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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우상 명리학자ㆍ역사소설가

 성희롱이란 말과 행동으로 상대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에선 경계가 불분명해서 어떤 언행이 성희롱인지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떠한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쌍방 당사자의 연령이나 관계, 장소 및 상황, 성적 동기나 의도의 유무, 행위에 대한 상대방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인 반응의 내용, 행위의 내용 및 정도, 행위가 일회적 또는 단기간의 것인지 아니면 계속적인 것인지 여부 등의 구체적 사정을 종합해,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춰볼 때 용인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인지 여부, 즉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인지 여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결이다. (1998년 2월 10일 선고 95다39533 등)

 법원의 설명은 “성희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행위자에게 반드시 성적 동기나 의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성희롱이 성립될 수는 없다.” 즉, 성희롱은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의 시각으로 봐야지 주관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례다. (서울고등법원 2005년 5월 26일 선고 2004누4286 판결, 대법원 2007년 6월 14일 선고 2005두6461 판결)

 요즘 ‘미투’를 통해 성범죄가 폭로되는 것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성범죄는 성욕의 흥분 또는 만족을 얻을 동기로 강제로 타인에게 성적인 수치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행위, 남녀ㆍ연령 여하를 불문하고 그 행위가 범인의 성욕을 자극ㆍ흥분시키거나 만족시킨다는 성적 의도 하에 강제로 행해졌을 때 성립된다.

 법적으로는 성희롱, 성폭행과 함께 성폭력에 포함되는 범죄다. 한국의 ‘형법’에서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해 추행을 한 죄를 강제추행죄로 규정하고 있다. (제298조) 그렇다면 어느 정도 신체에 접촉해야 성추행이 될까? 서로 사귀는 두 사람의 신체 접촉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못된 일이라, 키스를 하거나 끌어안는 등 성욕을 자극할 수 있는 애정 표현을 하면 성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될 수 있다. 의도가 아무리 순수해도 욕망에 이끌려 성적 부도덕에 빠지고 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남녀가 성관계를 갖지 않고도 음행을 할 수 있다. ‘음행’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포르네이아)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 단어는 부부가 아닌 사람들이 하는 온갖 형태의 성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기를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음행, 더러움, 방종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것들을 거듭 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갈라디아 5:19-21.) 여기서 ‘더러움’이란 무엇일까? 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말이든 행동이든 불결한 것은 무엇이든 가리킬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옷 속에 손을 넣고 어루만지거나, 옷을 벗기거나, 가슴과 같은 은밀한 부분을 만지는 것은 분명히 더러움에 해당할 것이다. 성서(잠언 5:18, 19.)는 가슴을 만지는 행위를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으로 묘사한다. 남녀가 신체적으로 진한 애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압력을 가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그 남자는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한낱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그런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여자는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욱 심각한 것으로, 여자는 이미 불결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며 그러한 행위는 음행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고린도 전서 6:9, 10) 사귀는 사람이 있을 경우, 부적절한 애정 표현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선을 미리 분명하게 긋는 것이 좋다. 하느님의 기준에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아 홍수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가 만연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 도시를 멸망시켰다. 오늘날도 그와 흡사하다. 세상이 끝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이유는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요한 1서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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