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16:17 (화)
문익점 선생 애민정신을 생각하며
문익점 선생 애민정신을 생각하며
  • 이병문
  • 승인 2018.04.08 2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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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문 국립산청호국원 현충과

 요즘 공직자 부패로 신문 사회 1면을 장식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공직자 청렴과 국민을 위해 일하는 자세가 그 언제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역사 속 공직자 중 개인 이윤보다도 국민을 먼저 생각하신 분 중 대표적인 인물로 문익점 선생을 들 수 있다.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자.

 문익점 선생은 1329년 산청 단성면에서 출생해 1360년 계품사로 원나라에 파견된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기록관)으로 중국을 방문해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 씨앗을 붓 통에 10개를 넣어 들어왔다.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 선생은 1364년 고향으로 내려와 장인 정천익과 목면 씨앗 5개씩 나눠 재배했다. 본인은 모두 실패했으나 장인의 5개 씨앗 중 1개가 꽃을 맺고 재배에 성공해 100개의 씨앗을 얻게 됐다. 이를 계기로 생산된 목면을 직조하는 기술까지 연구 개발에 매진해 대량화에 성공한다.

 선생은 이 기술로 개인적 사익을 챙기는 게 아니라 헐벗은 백성을 걱정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백성들은 삼베옷을 입었다. 여름에는 통풍이 잘됐지만 겨울에 베옷을 입고 지내야 하는 고통은 ‘헐벗은 고통’ 그 자체였다. 선생이 널리 존경받는 큰 이유는 헐벗은 백성들 의생활을 크게 변화시키고 나라를 부국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세종 때 면포 한 필이 쌀 두 말 가격과 맞먹었다. 여진족과 거래에서는 상등 말 한 필에 면포 40필로, 일본과는 은, 동, 소목 등과 거래했고 성종 때 일본으로 가는 면포 수출량은 50여만 필에 달했다. 면포는 동북아시아 무역질서에 중요한 한 축을 이뤘다. 이런 점에서 세종은 문익점 선생을 ‘부민후’(富民候),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로 추증토록 했다. 이에 반해 목면 재배에 번번이 실패해 조선에서 비싼 금액으로 면포를 수입해 사용한 일본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목면재배에 성공하면 큰 부를 누릴 수 있다고 판단한 토요타 사키치는 조선에서 목면 씨앗을 일본으로 가져가 목면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 토요타 사키치는 독점적인 목면 판매로 부를 축적했다. 더 나아가 토요타 자동차 전신인 토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를 설립, 면포 생산의 근현대화에 성공해 연 매출 180조에 이르는 토요타 자동차를 만들었다. 문익점 선생과 토요타 사키치는 자기 나라에서 최초로 면목 재배에 성공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성공 후 이들 행적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문익점 선생의 애민정신과 애국심, 청렴 자세 등은 선생 사후 600년이 지난 현재의 공직자가 꼭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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