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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없는 세상
어른이 없는 세상
  • 이광수
  • 승인 2018.03.29 2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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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소설가

 무소유의 청빈을 실천한 법정 스님이 입적한 날은 3월 11일이다. 세수 78세의 길지 않은 삶 속에서 물질이나 세속적인 이익에 대해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거부감을 보였던 분이었다. 또 한 분 김수환 추기경은 2월 16일 세수 87세에 선종했다. 자신을 ‘바보’라고 할 만큼 낮은 자세로 고귀한 영적 사랑을 국민들에게 나눠 준 큰 어른이었다.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두 분은 온 국민의 존경을 받은 큰 어른이었다. 지난 지세를 몸으로 겪으면서도 두 분은 국민정신을 일깨우는 밝은 사회 만들기 운동에 동참하면서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을 낮은 자세로 전파한 분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이 돌아가신 해가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법정 스님은 그 이듬해인 2010년으로 김 추기경을 따라가시듯 세상을 떠났다. 아마 두 분 큰 어른이 무소유와 낮은 자세로 서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품어 주고 어루만져 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위 두 분과 같은 큰 어른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두 분이 더욱 그리운 한편, 안타까운 마음이 큰지도 모른다. 존경할 사람, 본받을 만한 지도자가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이다. 존경심은 위안과 희망의 상징이다. 두 분이 행동으로 실천해 보여 준 고귀한 삶은 리더의 모범이었으며, 엄혹한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죽비와 사랑의 울림이었다. 어른이 없는 세상, 존경할 리더가 없는 세상엔 온갖 정치적 술수와 프로파간다로 위장한 허세가 판을 친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부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부정을 부정하는 정치집단의 반발로 막장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다. 권력의 사슬에 단단히 얽매인 정치세력들의 권력다툼에 국론은 분열되고 구태 정치판에 신물이 난 민초들은 진절머리를 치고 있다. 이 나라의 지성들은 바짝 엎드린 자세로 몸을 사리며 침묵을 금과옥조로 삼은 채 눈을 감고 있다. 세상을 들쑤셔놓는 사회관계망의 댓글 싸움은 급기야 남혐ㆍ여혐의 극단적 사회 풍조 마저 낳게 하고 있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권리는 민주사회의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가 통제되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하더라’, ‘카더라’로 남의 인격을 모독하는 무차별 인신공격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자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세계정세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신냉전 시대로 회귀시키려는 전제 독재세력의 힘이 강대해지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초강대국들의 최고 지도자들은 권력독점의 공고화로 독재의 길로 치닫고 있다. 그 속에 샌드위치 신세가 된 우리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계 제로 상태이다. 역사의 과거를 뒤돌아보면 아무리 거대하고 막강한 독재 권력도 민중의 거대한 반동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황제의 꿈을 접은 채 센터헬레나 고도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졌다.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 마르코스, 초우세스크, 사담 후세인 등 현대사의 이단아로 철권통치 한 전제독재자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진영대결은 정치세력들의 권력다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입으로는 언필칭 국민을 들먹이면서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에는 여야가 따로 없이 의기투합한다. 철저한 권력 이익 추구가 정치집단의 존재 목적일 뿐이다. 이러한 정국의 흐름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생각조차 화합과 융화는커녕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이라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도그마에 빠져 있다. 소위 불통의 사회 고착화 현상이다. 소통 부재의 불통사회는 오직 갈등과 대립만 존재할 뿐 그 끝은 공멸로 종결된다.

 6ㆍ13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 자리 하겠다고 나서는 인사들의 출마의 변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마치 자기가 현금인출기라도 되는 것처럼 각종 황당한 공약들을 거창하게 내세우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이 과연 개인의 영달이 아닌 시민의 진정한 심부름꾼이라고 믿는 시민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권력의 달콤한 맛을 잊지 못한 정치향수병에 걸린 사람들의 허망한 꿈이라고 치부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독단일까. 어른다운 어른이 사라진 사회, 지성이 침묵하는 사회는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로빈 윌리엄스가 외친 ‘카르페 디엠’이 교실이 아닌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계에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는 세상은 이상이요, 희망일 뿐인가. 어른다운 어른은 단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지고지순한 도덕률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소통하고 동고동락하는 가운데 맡은바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어른다운 어른이 아니겠는가. 지체된 정의는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듯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을 어른이 하지 않으면 어른이 없는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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