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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을 찢어놓고 “괘념치 말아라”
인격을 찢어놓고 “괘념치 말아라”
  • 류한열 편집국장
  • 승인 2018.03.08 2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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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은 인격
회복운동이다. 어떤
누구도 다른 인격체를 손끝 하나라도
다치게 할 권리는 없다.
▲ 류한열 편집국장

 내 동생은 지난 2016년 3월 31일 스스로 생명을 던졌다. 그날엔 벚꽃 비가 내려 마음에 더 큰 슬픔이 흘렀다. 휴대폰을 켜면 아직 동생과 나눈 카톡이 들어있다. “언니 요즘 너무 힘들어”, “사는 게 다 그렇지 힘내 혜정아”, “회사 가는 게 지옥 들어가는 기분이야. 죽고 싶어”, “또 그 소리. 힘내 사랑하는 동생아.” 그때 동생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게 한스럽다. 3월 말 벚꽃이 밉도록 화사하게 봄 단장하는 시기가 되면 언니의 볼엔 눈물이 스르르 타고 내린다.

 동생은 그날 벚꽃처럼 떨어졌다. 언니는 동생한테 받은 마지막 카톡 글을 잊을 수 없다. “회사에 악마 같은 사장님이 툭하면 성추행을 해. 지난주에는 회사 회식 후 성폭행을 당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아무리 나를 자책하고 발버둥 쳐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 언니 용서해줘.” 그리고 2년이 지나 또 3월이 왔다. 언니는 가슴이 아프다. 동생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지만, 벚꽃 한 잎 한 잎이 눈물방울이 돼 날아올 때는 언니는 사무치도록 동생이 그립다.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 운동은 인격 회복운동이다. 어떤 누구도 다른 인격체를 손끝 하나라도 다치게 할 권리는 없다. 하물며 온 인격을 손상하는 엄청난 짓을 한 사람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고 드러내 놓고 발설한 꼴이다. 터질 것이 터졌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천박한 구조로 짜여져 있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문화예술계, 종교계, 학계, 정치계 등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많은 ‘괴물’이 살고 있었나 놀랄 따름이다. 괴물과 뒤섞여 살면서 세상의 정의를 떠들었다고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은 지금까지 나온 괴물 드라마 가운데 최대급이다. 지사가 정무비서를 억압한 힘은 가공할 만하다. 안 전 지사는 “이리 오라, 저리 가라” 하면서 인격을 찢어놓고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 “괘념치 말거라”며 글을 남겼다. 위계에서 나온 힘으로 한 인격체를 완전히 불살라 버렸다. 오죽했으며 정무비서가 “그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어 폭로하게 했다”고 했을까. 무시무시한 힘이 부른 비극이다. 한 인격체를 꼼짝달싹 못 하게 해 놓고 마음껏 자기 욕심을 채웠다. 상대를 지옥으로 몰면서 자신은 쾌락의 천국에 빠졌다. 아, 이 얼마나 처절한 삶의 모순인가?

 정치권에선 미투가 정치 공세로 흐를 조짐을 보인다. 6ㆍ13 지방선거판에 강력한 변수로 떠올랐는데 야권이 그냥 놓아두기는 아깝다. ‘나도 당했다’미투가 ‘너도 당해봐라’ 유투가 될 공산이 크다. 야당이 정부와 여당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며 큰소리치고 대국민 사죄 등을 촉구한다. 이를 받아치는 여권은 이 사태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냐고 맞받아친다. 이 정도로도 꼴사나운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자칫 미투 운동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 아직도 꽃잎은 떨어지고 있는데….

 문화예술계에선 추잡한 미투 사건 현장이 미화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문화와 예술로 아무리 포장해도 추잡한 춤판이 성스러운 잔치가 될 수 없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물건’을 내놓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곁에 선 여성에게 만져달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괴물이라 불려도 마땅하다. 그 여성이 느꼈을 참담함은 평생 몸에 박고 다닐 생채기가 됐다. 영화감독이 예술의 이름으로 여배우를 ‘미투 베드’로 몰고 갔다. 그도 괴물이다.

 3월 말이면 벚꽃이 핀다. 올해 벚꽃은 ‘나도 당했다’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이어질 것으로 보여 화사할 수 없다. 무수한 벚꽃이 떨어질 때 미투 피해자의 처연한 삶이 그려질지도 모른다. 미투 운동이 몰려와서 몰려간 후, 우리 사회에 약한 인격체가 강한 인격체 때문에 부서져 내리는 비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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